소설가 정지아(43)씨가 두 번째 소설집 <봄빛> (창비 발행)을 냈다. 등단한 지 8년 만에 첫 소설집 <행복> (2004)을 펴내고 나서 쓴 단편 11편을 묶었다. 다섯 글자를 넘지 않던 작품 제목들이 이번 책에선 더 단출해져 열 편이 한두 자 명사다. ‘못’ ‘봄빛’ ‘풍경’ ‘순정’ ‘양갱’ ‘길’…. “낯간지러운 제목이 싫다. 사람도 얼굴(제목)보단 발(내용)이 예쁜 이가 좋다”는 것이 정씨의 말이다. 행복> 봄빛>
‘정지아’ 하면 그의 처녀작 <빨치산의 딸> (1990)부터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다. 빨치산 출신인 부모님의 체험을 소설 형식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20대 중반에 이 화제의 장편을 발표한 정씨는 96년 정식 등단 후 7년 가량 ‘휴지기’를 보냈다. “30대 시절 내내 2년 걸러 한 편쯤 썼을려나. 주제만 부각되는 작품보단 내 안에서 체화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빨치산의>
80년대 학번으로서 품었던 진보의 열망을 꺾는 현실 속에서 삶을 되돌아봐야 하기도 했고.” <행복> 은 그렇게 오랜 모색 끝에 내놓은 작품집이었고, 그 속엔 “멈춘 시간 속에 붙박여 좌절된 정치적 꿈과 희망 없는 현재를 견디는 유령들”(평론가 김영찬)이 배회했다. 행복>
새 작품집에서 정씨의 관심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로 옮아간다. 늙는다는 것, 기억을 잃는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 2006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풍경’엔 외딴 산집의 치매 걸린 90대 노모와 60대 막내 아들이 나온다. 몇 번이고 밤봇짐을 싸면서도 끝내 홀로 남은 모친을 버리지 못한 막둥이를, 어미는 30년 전 정신을 놓으며 가장 먼저 잊는다.
막내를 오래전 집 떠난 아들들로 착각하더니 결국 그들마저 잊고 단단한 침묵에 들어선다. 그러던 어머니가 문득, 웃으며 묻는다. “내 새끼, 그래 한시상 재미났는가?” 어린 시절 막내가 “시상에 나가먼 먼 재밌는 일이 있능가 글고 얼릉 (어매 뱃속에서) 나와부렀제”라고 천진스레 말했을 때 웃으며 대꾸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죽음이 기억을 한 켜씩 걷어내며 드러내는, 한 인간에게 새겨진 세월의 무늬가 서글프고도 따뜻하다.
‘봄빛’과 ‘세월’은 짝패다. 둘은 기억을 잃어가는 노년 남자의 이야기를 상이한 시점과 형식으로 다룬다. 너무 강인해서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꼈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음을 확인한 ‘봄빛’의 아들은 “고리대금업자 같은 비정한 세월이 자신으로부터도 수금을 시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마음은 아버지가 여덟 살 소년 가장이 됐을 때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근디 이상하지야. 눈앞이 캄캄헝게야, 무선 것이 없드라.”
‘세월’은 늙은 아내의 독백이다. 남편은 빨치산이었다. 갓난아이를 들쳐업고 겨울산을 찾아 헤매고, 혼자 아이 키우고 농사 지으면서 감옥살이 뒷바라지 하는 신산한 삶을 보낸 후에야 곁에 두게 된 남편은 야속하게 기억을 잃어간다. 하지만 고맙다. “영감, 젊어서는 보고 자파도 ?씩?없등만 늙응게 인자 제우 내 차지가 돼요이. 잘 왔소. 안 잊아불고 내 ?씬막?찾아들어 고맙소이.”
이처럼 정씨는 소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을 담담히 드러낸다. 한층 농밀해진 문장이 정서적 울림을 더한다. 특히 작가의 고향(전남 구례) 지역 사투리의 너울댐이 아름답다. 오로지 이 구성진 입말에 기대 써내려간 ‘세월’은, “행을 바꾸면 시처럼 읽혀야 한다”는 소설가 박상륭씨의 말을 문장쓰기의 철칙으로 삼고 있다는 작가의 한 성취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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