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9 총선을 가늠하기 위한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의 전통 표밭인 영남 분위기가 꽤 뒤숭숭하게 나타나고 있다. ‘싹쓸이’의 폐해를 생각하며 긴 눈으로 보자면 오히려 잘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한나라당, 그리고 당선이 어렵거나 위태로워진 한나라당 후보들은 적잖이 속이 쓰릴 것이다. ‘공천 진통만 그렇게 심하지 않았더라도…’하는 한숨이 나올 만하다.
공천 탈락자들의 항변과 하소연, 권토중래 다짐이 잇따랐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권철현 의원이다. 그는 막연히 억울함을 하소연한 다른 많은 탈락자들과는 달리 도덕성, 전문성, 당 기여도, 여론조사 지지도 등 공천심사 기준을 하나하나 들어 경쟁자와 비교해 가며 공천탈락의 부당성을 부각했다.
그의 주장은 공천에는 으레 진통이 따른다고 마음 편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도 의문을 일깨웠다. 그가 대표적 ‘친이파’의 한 사람이란 점에서 우선 그 주장이 일종의 내부고발처럼 들린 데다 내용도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명백하고 통보된 기준 필요
‘고령ㆍ다선’이란 잣대가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과 이상득 부의장을 같은 눈금으로 재지 못해 망가졌고, 합리성을 가질 만한 다른 기준들도 권 의원의 항변으로 힘없이 무너졌다. 마땅히 내세울 합리적 기준이 불분명하면 ‘어처구니 없는 탈락’ 주장이 저절로 힘을 얻는다.
정도의 차이일 뿐 통합민주당도 예외가 아닌 이번 공천진통을 통해 여야가 얻은 교훈은 있다. 앞으로도 아래로부터의 결정 대신 위로부터의 심사를 통해 국회의원 후보를 결정하겠다면 사전에 공천심사의 평가항목을 각각의 반영비율이나 가중치까지 포함해 명백하게 알리지 않고서는 최소한의 승복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값지게 간직해야 할 교훈이다.
어처구니 없는 탈락은 정치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화합보다는 ‘주도권 다툼’에 능하다는 평을 들어온 한국정치학회가 모처럼 입을 모아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이성형 교수의 복직을 외치고 있다. 이화여대 동료교수를 비롯한 각 대학 교수들 370여명이 서명에 나섰고, 이화여대 학생들이 펼친 별도 서명운동에도 1,700여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이 교수는 2005년 3월 이화여대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으로 임용됐다.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2007년 사립학교법 제52조의 2에 따라 마땅히 ‘재임용’ 심사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학교측 요구에 따라 1년의 연장 재계약을 했다. 학교측은 지난해 말 재임용 심사 대신 신규채용에 응모하도록 했다가 채용탈락을 최종 통보했다.
법규에 어긋나는 형식 절차의 강요가 어처구니 없는 것도 그렇지만, 그 내용은 더하다. SCI(과학논문 인용색인) 논문이 없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미달한다는 것이 비공식적으로 거론된 이유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중남미 비교정치학자인 그는 외국에서 영어ㆍ스페인어 강의를 자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SCI 논문이 필요하다고 알려 주기만 했어도 얼마든지 요건을 충족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다. 또 SCI 논문이 정말 재임용의 기준이라면, 이를 통과할 사람이 극히 적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허울만의 글로벌 스탠더드?
‘글로벌 스탠더드’운운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스페인어 강의가 가능할 정도인 그가 충족할 수 없는 ‘국제화’잣대가 도대체 뭘까.
그가 부산대를 나와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보아 혹시 외국유학? KAIST 출신 곽유상 박사나 전남대 출신 이수경 박사 등 토종박사를 미국 명문대학이 모셔가는 마당에 ‘원산지 증명’을 재임용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보다 더 후진적이고 무지한 행태가 없다.
그는 3년 동안 전공 내에서 강의평가 1위를 달렸고, 연구성과도 900% 가까웠고, BK21 사업 유치에도 핵심역할을 했다고 한다.
후보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개혁공천’과 ‘물갈이’가 불투명한 기준 때문에 엉뚱한 공천진통을 불렀듯, 대학 경쟁력을 높이려는 교수 재임용도 명백한 기준과 절차가 없다면 논란의 불씨가 될 뿐이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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