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대한 날씬해 보이도록 입는 게 최고의 패션 미덕이었다. 그래서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타이트한 슬림 핏(Slim Fit) 스타일의 옷은 여성복을 넘어 남성복에까지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로맨틱한 패션이 각광받는 요즘, 실크나 새틴 등 부드러운 소재가 떠오르면서 옷의 실루엣도 유연하고 넉넉한 분위기로 점차 달라지고 있다.
“2008년은 지난 3~4년간 지속됐던 장식을 배제한 미니멀리즘이 가고 반대 급부의 맥시멀리즘으로 바뀌는 과도기이자 유행의 흐름상 중요한 시기이다.”(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노소영 책임연구원) 더욱이 스포티즘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옷의 실용성이 강조돼 남자친구의 옷을 빌려 입은 듯 편안함 속에 멋스러움이 스며 있는 의상이 유행이다. 소위 ‘보이프렌드 핏(Boyfriend Fit)’에 주목해야 할 때다.
보이프렌드 핏의 여성복은 단순히 남성성을 추구한 매니시 룩과는 차이가 있다. 말 그대로 남자 친구의 옷장에서 막 꺼내 입은 듯한 스타일로, 남성 패션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보이시 룩에 가깝다. 여성성이 살아 있다는 이야기다. “올 봄 여성 패션의 대세인 보이시 룩은 남성복의 실루엣을 가져오되 여성스러운 장식을 살려 귀여운 느낌이 들도록 한 게 특징입니다.
남성처럼 입는 머스큘린 룩과는 다르죠.” 온라인 쇼핑 사이트 옥션의 여성 패션 담당 송하영 카테고리 매니저의 말이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흔히 보이는 헐렁한 화이트 셔츠를 입은 여성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엉덩이를 덮는 넉넉한 품과 길이의 셔츠를 입은 여배우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섹시해 보이지 않던가.
쇼핑가엔 실제 셔츠형 원피스가 많이 나와 있다. 셔츠 스타일의 원피스는 파스텔 톤의 팬츠나 레깅스와 함께 입으면 보이시 룩을 넘어 소녀 같은 귀여운 이미지까지도 선사하는 아이템이다. 여기에 두꺼운 벨트를 매 허리를 강조하면 좀 더 여성스러운 스타일로 변화를 줄 수 있고, 가느다란 벨트를 활용하면 캐주얼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레깅스만 입는 것이 다소 밋밋하다면 셔츠 위에 짧은 재킷이나 베스트(조끼)를 함께 입는 것도 세련된 코디네이션이 될 수 있다.
보이프렌드 핏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올 봄 유행 아이템은 무엇보다 팬츠다. 가장 감각적인 패션 상품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배기(Baggy) 팬츠가 대표적이다. 배기는 ‘헐렁헐렁하다’ ‘불룩하다’는 의미. 1970년대 중반 등장한, 자루처럼 넉넉한 스타일의 팬츠를 가리킨다.
허리부터 힙선, 허벅지를 아우르는 라인이 풍성해 통통한 하반신을 보완해준다. 이번 시즌에는 발목으로 내려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디자인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승마바지로 불리는 페그 톱 팬츠(엉덩이에서 허벅지까지 라인이 부풀게 디자인된 팬츠)도 넉넉한 실루엣의 유행을 알리는 일등공신이다.
이런 여유 있는 품의 팬츠는 셔츠나 블라우스와 매치한 다음 발목을 드러내는 부티를 신으면 멋스럽게 연출할 수 있다. 캐주얼한 트레이닝 배기 팬츠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하이톱 운동화와 잘 어울린다. 특별한 장식이 없이 폭이 넓은 와이드 팬츠는 그 자체로는 여성성을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에 화려한 러플(주름장식)이 달린 블라우스와 함께 입으면 조금 성숙한 분위기의 색다른 보이시 룩이 된다.
남자 친구가 아니라 아예 아버지의 양복을 꺼내 입은 듯한 빅 재킷도 유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내 의류브랜드 모그의 경우 올해 처음으로 빅 재킷을 출시했다. 빅 재킷은 최근 뉴욕컬렉션에서 필립 림, 입생로랑 등이 선보여 이미 유행을 예고했다. 빅 재킷은 짧은 스커트나 팬츠와 매치하는 게 무거운 느낌 대신 생동감 있는 스타일로 재탄생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밖에도 베스트나 흔히 멜빵으로 부르는 서스펜더도 보이프렌드 핏을 극대화하는 아이템들이다. 베스트는 지난해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남장 여자로 등장한 탤런트 윤은혜가 입으면서 큰 관심을 모았다. 블랙 베스트를 화이트 셔츠나 원피스와 스타일링할 경우 보이시하면서도 발랄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멜빵은 소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아이템이다.
서스펜더 미니스커트나 서스펜더 숏 팬츠를 선택하고 여기에 깔끔한 단색 티셔츠를 매치하면 로맨틱한 보이프렌드 핏이 되고, 박스 티셔츠나 화이트 셔츠를 입으면 매니시한 느낌이 완성된다.
하지만 무조건 넉넉하다고 보이프렌드 핏은 아니다. 여유로운 실루엣의 의상을 입을 때는 무겁지 않고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중요하다. 자칫하면 밋밋해 보이거나 진짜로 다른 사람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다.
LG패션 여성복 브랜드 모그의 함준희 디자인실장은 “매니시 룩이 여성성이 배제되고 남성성만 추구한 것이라면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짧은 헤어스타일이나 빅 티셔츠, 빅 재킷, 와이드 팬츠 등은 모두 보이시함으로 포장된 발랄한 여성스러움이 본질”이라고 말한다. 중성적인 아이템을 발랄한 분위기로 여성스럽게 스타일링하는 것이 보이브렌드 핏의 실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화이트 셔츠에는 좁다란 여성용 타이 혹은 스카프를 매치하거나, 베스트에는 중절모를 코디하는 등 액세서리를 적절히 활용해 일부러 중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음을 드러내도록 입는 것이 좋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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