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한라산이라면, 전남 영암 땅에선 월출산이 그렇다. 월출산은 영암이요, 영암은 곧 월출산이다.
낮게 깔린 영암의 너른 평야에서 홀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른 거대한 암봉 월출산. 809m의 나지막한 높이에도 불구하고 땅의 기운을 한데 모아 치받아 오른 그 형상이 신령스럽다.
그 산의 정기는 영암 땅 곳곳에 뻗치고 있다. 영암인들은 월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들 중 가장 작지만, 금강산에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고 자부한다.
월출산은 3가지 방법으로 감상해야 한다. 먼저 멀리서 한 눈에 산을 조망하는 것이고, 다음은 산의 둘레를 돌면서 가볍게 월출산의 기운을 흠뻑 들이마시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거친 암봉의 품에 뛰어들어 그 빼어남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것이다.
● 덕진차밭에서의 조망
영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월출산에 깃드는 여명을 바라보고 하루를 시작하고, 밤에는 월출산에서 떠오른 달을 보며 잠자리에 든다. 영암 땅 어디에서든 월출산은 보인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망이 있게 마련.
영암 사람들이 꼽는 월출산 조망의 키 포인트는 덕진면 백룡산 자락에 있는 덕진차밭이다. 12만㎡ 규모로 영암군 내에서 가장 큰 차밭이다. 덕진면 선암리에서 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농로를 따라 산자락을 오르면 산기슭에 거대한 초록의 융단이 꿈틀대는 것이 보인다. 야트막한 차밭 꼭대기에 서면 암봉으로 이루어진 월출산의 모습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덕진차밭에서 월출산을 보기 가장 좋은 시간은 해 뜰 무렵. 대낮에는 역광을 받아 월출산의 굴곡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차밭 위에 우뚝 솟은 월출산은 마치 초록이끼 낀 받침대 위에 놓인 잘 생긴 수석과 같다. 아침 햇살을 받은 차밭과 안개에 싸인 월출산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차밭 너머로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그 뒤편으로 거대한 암봉, 암산이 강파르게 솟았다. 산자락 밑에 엷게 깔린 안개는 산과 땅을 분리, 조용한 아침의 월출산은 하늘로 둥실 떠올라 보인다.
● '기(氣) 도로'를 아십니까
월출산 서쪽 자락, 군서면 구림리에는 왕인 박사 유적지가 있다. 일본에 문명을 선물한 백제 왕인 박사를 모신 사당 등이 있는 곳이다.
유적지에서 월출산 문필봉 중턱의 왕인 박사가 공부를 했던 문산재, 양사재까지 아름다운 산책로가 조성됐다. 기존의 산길을 다듬은 산책로다. 이 길은 영암군에서 공들여 조성중인 '월출산 기 웰빙도로'의 한 구간이다. 군은 월출산을 빙 둘러 국립공원 관할지역 외곽으로 왕인 박사 유적지에서 천황사지까지 총 12km 되는 도로를 조성중이다.
이 중 왕인 박사 유적지에서 문산재까지 2.1km가 먼저 완공됐고, 영암읍 쪽 실내체육관에서 약수터까지 2.9km 구간도 최근 거의 완성됐다.
주민들은 간단히 '기 도로'라고 부른다. 월출산의 기운을 받는다는 길이다. 문산재까지 이르는 길은 왕복 2시간 거리. 이 길을 걸으며 그 기운을 받았다는 이들이 여럿 있다. 우미건설사 이광래(74) 회장은 IMF의 충격으로 사업의 어려움을 겪을 때 이 길을 거닐며 재기의 의욕을 북돋았다고 한다.
길 중간에는 이 회장이 이 길에 대한 감상을 적은 시비가 있다. 10년 전 영암군청의 모 과장도 이 길의 덕을 톡톡히 봤다. 주변 사람들이 "송장 칠 사람"이라고 걱정했던 그는 왕인 박사 유적지 관리소에 근무하게 되면서, 이 길을 꾸준히 걸으며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한다.
산책로는 아기자기하면서 재미있다. 문산재 못미쳐 약간의 오르막이 있을 뿐 호흡이 가빠오거나, 다리에 무리가 가는 급경사 코스가 없다. 깊게 우거진 소나무숲을 지나고, 한지 재료인 닥나무꽃 노랗게 피어난 꽃길도 지나고, 중간 중간에 뻥 뚫린 시야에는 드넓게 펼쳐진 영암벌의 풍요로운 풍경이 들어온다.
길의 끝 문산재는 이 길의 하이라이트. 월대암 등 뒤편의 봉우리와 한데 어울려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문산재 뒤편에는 왕인 박사가 공부했다는 책굴과 그의 모습을 새긴 석상이 있다.
● 몸으로 오르는 호남의 소금강
먼데서만 바라보거나 주변만 훑어서는 감질만 날 뿐이다. 월출산을 제대로 느끼려면 역시 산행만큼 좋은 것이 없다.
누구는 월출산을 아름다운 나신으로 비유한다. 바위산인 월출산은 그 아름다움을 다른 육산처럼 숨기지 않고 다 벗어 보여준다는 것. 단 그 아름다움의 감동은 산을 높이 오를수록 커지기 때문에 더 높이 오르는 자만이 차지할 수 있다.
월출산으로 오르는 길은 천황사, 도갑사, 경포대, 무위사 등 4곳이다. 제대로 월출산의 속살을 즐기려면 천황사-천황봉-바람재-구정봉-미왕재-도갑사를 종주하는 게 좋다. 약 6~7시간이 걸린다. 암봉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코스라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가장 단시간에 월출산 천황봉으로 오르는 코스는 천황사에서 시작한다.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의 맨땅에서 솟은 산이라, 산행은 처음부터 급경사를 올라야 한다. 809m를 만만하게 보고 처음부터 무리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따뜻한 볕과 시원한 바람이 교차하는 봄 산행길. 등산로 초입에는 동백이 붉게 타올라 산꾼들을 응원한다. 계단길을 오르느라 흘러내린 땀은 암봉을 스쳐 내려온 바람이 금세 씻어준다. 철계단이 곳곳을 잇는 가파른 코스를 오르지만 마냥 힘들지만은 않다. 수직으로 오르는 만큼 주변 풍경도 변화무쌍해 월출산의 기암들이 수놓는 다양한 경치를 감상하노라면 산행의 수고는 금세 잊어버린다.
1시간 조금 넘게 오르면 깎아지른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빨간 구름다리를 만난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위치(해발 510m)에 있는 구름다리란다. 다리 밑의 땅까지는 120m.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 보면 아찔하다.
1978년 처음 놓인 이 다리는 2006년 지금의 모습으로 튼튼하고 새롭게 바뀌었다. 밑바닥에 구멍도 없고, 웬만한 바람에는 흔들리지도 않는다. 다리를 건너는 산행객들은 튼튼한 다리 위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구름다리에서 한 시간 가량 오르면 월출산의 정상인 천황봉이고, 또 그곳에서 40분 가량 더 가면 구정봉이다.
구름다리에서 보이는 풍경에만도 가슴이 벅차 이제 그만 내려갈까 하는데, 지나는 산행객들이 자꾸 말린다. "월출산에 왔음 천황봉, 구정봉은 봐야 하는디. 이건 맛보기에 불과혀." 팍팍해진 허벅지를 두들기며 좀 더 오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월출산=글ㆍ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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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띄우는 편지/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여행중 마음에 얹어지는 감동은 풍경에서 올 때가 많지만 때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이번 영암 월출산 여행길에 잠시 이웃인 강진의 백련사를 들렸습니다. 사찰 옆 동백림의 만발한 동백을 사진에 담는다는 핑계로, 그곳에 있는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난해 봄 에베레스트 원정대 취재 때 동행했던 2006 미스코리아 김수현씨입니다. 저와는 2~3주 고산 트레킹을 함께 하며 히말라야의 정을 나누었던 동지입니다.
한 달 전 만났을 때 그녀는 문득 백련사에서 3주 가량 머물겠다고 했습니다. 고시공부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절에 들어가려는 걸까 궁금했던 차에 마침 인근에 취재 나온 길, 그녀가 과연 작정한대로 ‘무료한’ 사찰 생활을 잘 견디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생각 외로 그녀는 너무나 환한 얼굴로 반겨주었습니다. “어땠냐” 묻기도 전에 “스스로를 다독이려고 들어왔는데, 너무나 절 생활이 잘 맞아 행복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오전 4시 새벽예불을 시작으로 하루를 열고는 독서와 산책, 그리고 연등 만들기, 설거지, 청소 등 사찰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우며 지낸 그 시간에 충실했다는 그녀. 미스코리아로서 조금은 번잡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 관심을 나누다보니 마음이 열리고 엉켜있던 생각이 정리됐다고 하더군요.
사찰 뒷산의 모든 오솔길을 섭렵하고, 길에서 공양에 쓸 쑥을 캐오고, 절에서 키우는 개들 몸의 진드기를 잡아주고, 이웃의 농촌 마을을 돌아보며 보낸 시간들. 평생에 다시 없을 것 같은 그 시간들로 하루 하루가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눈을 보아하니 괜한 허영은 아닌듯 합니다.
“이젠 연연해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젠 삶에 옴팡 젖어들 수 있겠다”는 그녀의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곧 일본으로 다른 준비를 위해 인생 공부를 떠날 그녀에겐 사찰에서의 짧은 경험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내공을 쌓는 과정이었습니다.
잠깐 그녀와 차 한 잔 나눈 시간이었는데 그 내공의 기운이 제게도 번지는지 가슴이 뿌듯해지던군요. 그녀의 일상 밖으로의 여행이 준 감동을 제 여행길의 빈 자리에 슬쩍 태워왔습니다. 여행의 추억도 함께 나누면 커지나 봅니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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