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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보증·사채로 무너진 가정, 그리고 절망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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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여성시대와 함께하는 우리 이웃 이야기] 보증·사채로 무너진 가정, 그리고 절망의 나날…

입력
2008.03.2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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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부부는 1톤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과일장사를 합니다. 원래는 프랜차이즈 치킨점을 운영 했는데 주식으로 손해보고,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보증 빚 늘고, 그러다 가게 지키겠다고 사채를 끌어 썼다가 또 당하고 말았죠. 너무도 짧은 시간에 터진 현실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걸레로 닦는다고 한들 범위가 너무 넓은데다 걸레를 들 힘마저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달리 아내는 과감했습니다. 가게를 처분해서 제일 급한 사채부터 정리했습니다. 반년도 안된 사이에 원금의 35%나 불어난 이자는 너무 대단했죠. 그렇게 사채를 정리하니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갚아야 할 빚들은 여전히 발목을 잡았습니다. 누구에게 손 벌릴 처지도 못됐고 찾아간들 나올 곳도 없었습니다.

제가 또 망설이자 이번에도 아내가 과감히 나섰습니다. “이렇게 슬퍼하고 멍하게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빨리 털고 일어나자”고 제 손을 끌었습니다. “바닥에 마냥 앉아 있으면 바지만 더 더러워질 뿐이니 빨리 일어서는 게 상책”이라고 말이죠. 그렇게 해서 아내가 형부로부터 거의 빼앗다시피 해 받아온 차가 지금의 저희 밥줄 입니다. 치킨은 팔아 봤어도 남 앞에서 직접 장사한 경험이 전무해 걱정했지만 아내는 “배부른 소리 말라.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느냐. 정신 나간 소리 말라”고 제 등을 떼밀었습니다.

적재함 과일 채우기, 물건값 정보까지 모든 걸 아내가 척척 해 냈습니다. 가게에서 장사할 때만 해도 평범한 아줌마 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정보 박사가 됐습니다. 컴퓨터가 사라진 집 대신 우체국과 동사무소에서 인터넷을 쓰며 정보를 직접 찾아냈습니다. 밥도 굶어가며 뛴 발품의 대가로 첫 장사 치고는 싱싱하고 값싼 과일들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선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던 사람이 이제는 넉살도 늘어 같이 술도 마셔가며 과일값을 깎는 도사가 됐습니다.

차의 마이크도 아내가 잡습니다. “자, 과일이 왔어요. 이거 먹으면 시집 못간 노처녀들은 당장 축의금 받을 일 생기고, 머리도 맑아져 점수가 팍팍 오르고, 기운이 늘어나 밤에도 행복하고, 아이들 영양식으로도 그만입니다. 자 오세요, 가고 나서 후회하시지 말고.. .” 아내에게 마이크 잡는 대신 녹음해 틀자고 했지만 “노래도 립씽크와 라이브는 다르듯 광고도 그때그때 생동감있게 해야 호응을 얻는다”고 고집합니다.

어느 동네에선 언제 뭐가 잘 팔리는지 등을 꼼꼼히 정리한 아내의 노트는 일급정보 그 자체 입니다. 사람들이 뭘 좋아하고, 어떤 가격대를 원하고, 어떤 말에 움직이고, 누가 사람들을 데려오고, 어느 집에서 마이크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지까지 세세한 사항들을 모두 기록해 놓았습니다. 집에 도둑이 들면 패물은 빼앗겨도 노트는 절대 안 된다는 겁니다.

아내는 손님들에게 처음부터 과일 얘기를 하지 않고 등에 업혀온 손주들, 옆의 아이들에게 먼저 관심을 보입니다. 아이들 손에 넙죽 과일 하나 집어주면 다들 ‘받았으면 사줘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답니다. 경로당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가 먼저 서비스하기도 합니다. 과일도 직접 깎아 드리고 사는 얘기도 나누면서 정을 새겨두면 결국엔 이득이 되서 돌아옵니다. 단순히 주머니만 채우는 게 아니고 힘든 마음을 위로 받으면서 다시 힘을 얻는 계기로도 만들죠. 너무도 뛰어난 상술을 발휘하는 아내를 보면 시대를 잘못 만났고, 남편을 잘못 골랐다는 미안함이 듭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 이틀에 한번 꼴로 목이 아파 밤새 끙끙 앓습니다.

제가 세 번이나 바보처럼 굴지 않았다면 아내가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텐데, 제가 한심한 짓만 골라 해서 아내를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 아내는 “미안한 줄 알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라”고 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빨리 끝내서 행복한 시간 많이 만들어 달라”면서 말입니다.

차 속 사진에는 지금 함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당장 저희 먹고 살기도 어려워 장모님이 두 애들을 맡아주시고 계십니다. 아내는 사진을 외면했습니다. 미안하고 고통스럽고 보고 싶은 마음에 작은 달력으로 사진을 자꾸 가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지갑 속에 사진을 넣었습니다. 그렇지만 눈에는 안 보여도 어떻게 마음 속까지 지울 수 있겠습니까. 옆에서 느껴지는 아내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뛰고 더 열심히 살려 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한 낡은 차도 새로 사고, 빚도 갚고, 일주일에 한번 제대로 보기 힘든 애들과 다시 함께 살아야지요. 가수 남진씨의 ‘저 푸른 초원 위’의 삶은 우리에겐 다시 아이들과 모여 사는 것입니다. “적재함이 무거우면 기름이 많이 소비된다”며 이동할 때 과일박스 하나는 꼭 무릎에 올려놓는 아내에게 진 빚을 빨리 갚고 싶습니다.

이제 점심도 다 먹었으니 다시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늦으면 아내한테 ‘엎드려 뻗쳐’를 당하니까요.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박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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