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을은 4ㆍ9 총선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대선후보를 지낸 여야의 두 거물,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와 통합민주당 정동영 후보가 당의 명예와 자신의 명운을 걸고 맞붙는 곳이 바로 동작을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텃밭을 버리고 낯선 동작을에 마주 섰다.
'승자는 천국, 패자는 지옥'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활이 걸린 싸움이다. 정동영 후보에게 승리는 대선 패배를 일거에 만회하는 재기를 의미하며 정몽준 후보에게 승리는 당권을 넘어 대권까지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을 뜻한다.
현재 판세는 정몽준 후보 쪽이다. 하지만 격차가 근소해진 여론조사도 나오기 시작했다. 초반 정몽준 후보가 50%에 육박하며 정동영 후보를 15~20%포인트 앞섰으나 가장 최근인 22일 KBS_미디어리서치 조사에서 정동영 후보는 35.0%를 기록, 정몽준 후보(40.9%)와의 차이를 5.9% 포인트로 좁혔다.
정동영 후보측은 "보수적으로 분석해도 현재 10%포인트 안팎으로 차이를 좁혀 맹추격중"이라며 "앞으로 교육, 뉴타운 문제 등을 앞세워 바닥을 파고들면 충분히 역전승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몽준 후보측은 "아직도 15%포인트 이상의 격차가 나고 있다"며 "힘 있는 여권 후보로 지역 발전을 견인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구체적 공약으로 승부하면 낙승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27일 찾은 사당동 골목시장에서 만난 민심도 엇갈렸다. "발전을 기대하는 지역정서로 보면 아무래도 여당 후보가 유리할 것"이라는 의견과 "한나라당 하는 꼴 좀 봐. 야당 표가 결집할 테니 두고 봐라"는 목소리가 공존하고 있었다.
■ 현충원·골목상가… 100리 행군
4ㆍ9총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27일 서울 동작을 지역구 K목욕탕 입구. 신새벽 먼동 사이로 통합민주당 정동영 후보의 모습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오전 6시10분. 잠에서 막 깬 듯 부스스한 머리에 목욕가방을 든 모습이 동네 주민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18일부터 매일 첫 일정을 목욕탕에서 시작했으니 벌써 10일째. "어디 사세요." "처음 오셨나요." 샤워를 마친 정 후보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사이 주민들에게 부지런히 인사를 건넸다. 20여분이 지나 밖으로 나온 그는 "알몸으로 부딪히니까 더 진솔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며 '목욕탕 유세'를 예찬했다.
이날 정 후보는 걷고 또 걸었다. 국립 현충원 참배 등을 위해 잠시 차량을 이용한 것을 제외하면 하루 동안 100리 가까운 거리를 주로 도보로 이동하며 유권자에게 다가갔다. 새벽부터 시작된 바닥 민심 다지기는 자정이 다 돼서야 끝이 났다.
오전 7시 지하철 이수역 앞. '동작을 교육과 정치의 신1번지로, 정동영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 밑에서 그는 출근 인사를 시작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권자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감싸며 눈빛을 맞췄다. 허리는 90도보다 아래로 굽어졌다. 등교하던 학생과 여성 유권자가 휴대폰 카메라로 연예인 대하듯 그의 얼굴을 찍기도 했다.
1시간30분여의 출근길 인사를 마친 정 후보에게 각오를 물었다. "이번 선거에서 민심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그래야 민심을 호랑이처럼 모신다."
동작동 현충원을 참배하고 해장국으로 늦은 아침을 하는 식당에서 가벼운 구수회의도 이어졌다. "동작을은 교육과 재개발 문제가 핵심입니다. 정몽준 후보가 지난 국회 의정활동 꼴찌였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참모들의 조언이 쏟아졌다.
정 후보는 그러나 선거 출정식에서 정몽준 후보를 비방하는 대신, "나라 경영을 꿈꾸던 정치인으로서 아이들이 차별 없이 제대로 교육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겠다. 세입자도 함께 살 수 있는 주민 친화형 뉴타운을 건설하겠다"며 차별화를 꾀했다.
사당동 남성시장에서 출발한 그는 동작동 이수복지관에서 점심 배식 봉사를 하고 사당동 상도동 흑석동 아파트 단지, 골목상가, 시장을 쉴 새 없이 누볐다. 한 시장 상인이 "벌써 3번째 보네"라고 할 정도였다.
정 후보는 길 가다 마주치는 주민에게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건넸다. 사당3동에 들어서자 "저희는 팬이에요", "손 한 번만 잡아요"라는 여성 유권자의 환성도 쏟아졌다. 하지만 그가 큰 절을 하고 10여 차례 이상 허리를 굽혀도 별반 반응이 없었던 노인회 간부 모임 같은 곳도 있었다.
"오늘 지역구를 한 바퀴 돌며 사교육비 폭등, 주거문제 등 평소 생각하던 문제점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중산층과 서민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동작을 출마 후보자 중 이들의 꿈을 대변할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생각해 달라." 13일 간의 선거운동에 돌입하며 정 후보는 이렇게 호소했다.
■ 새벽부터 자정까지 "서민 정치"
27일 새벽 6시40분. 서울 지하철 4호선 이수역 13번 출구.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가 파란색 점퍼 차림으로 나타났다. 부인 김영명씨와 함께였다. 그의 하루는 더 일찍 시작했다. 앞서 5시50분 선거사무실에서 이미 전략회의를 열었다.
이수역의 정 후보는 집요했다. 한 사람의 유권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무관심하게 지나치려는 시민들에게까지 달려가 "도와주세요"를 외치며 허리를 숙였다. 두 손을 덥석 잡는 것은 기본. 투표권이 없는 학생들에게도 "공부하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냐"며 어깨를 감쌌다.
2시간 동안의 출근길 인사가 끝난 뒤 슬쩍 껄끄러운 질문을 던졌다. "DY(정동영 후보)가 따라 붙는 것 같은데 불안하지 않냐"고. 그러나 정 후보 표정에 변화가 없다. 그는 "격차가 줄어든 조사가 하나 있었지만 대체로 20%포인트 가량 차이가 난다"고 자신있게 답했다. 그러면서 사당동 뉴타운 건설, 학교 유치, 국립현충원 주변 공원 조성, 골목길 확장 등 공약들을 일일이 설명했다. 그는 "어렸을 때 와봤던 동작에서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며 "내가 말은 잘 못하지만 행동으로 동작을 발전시키겠다"고 강조했다.
인근 해장국집에서 늦은 아침을 하면서 정 후보는 민감한 언급도 주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선 돈선거 파문'을 도마에 올렸다. 정 후보는 "공천에 책임있는 사람은 중징계해야 한다"고 했다. "공천의 논리적 일관성이 부족했다" "공심위에 초선들이 많이 포함돼 있는데 그들이 선출직인 최고위원도 잘랐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는 등 비판이 거침없이 나왔다. 말수가 적은 평소의 그가 아니었다. "울산에서 동작을로 옮기면서 불안하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회전할 때 넘어질 듯 해야 속도가 붙는다"는 말로 대신했다.
식사를 마친 그는 오전 10시 출정식에 이어 사당동 재래시장 방문, 오후 2차례의 거리 연설 등 밤 10시까지 숨돌릴 틈 없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그가 이날 특별히 강조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민이었다. 정 후보는 연설 때 마다 "정치인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서민을 이용하는 정치인과 서민을 위하는 정치인이다"며 "저는 서민을 중산층으로 만들어 잘 살게 해주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또 지역 호남 유권자가 30%가량 된다는 점을 의식, 지역감정 해소를 강조했다. 정 후보는 "지역감정은 망국병이다. 선거 때마다 이를 이용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우리가 말려야 한다"며 "유권자 여러분들이 지역감정에 현혹되지 말고 동정심에도 흔들리지 말고 냉정하게 판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막판 호남표 결집 현상이 나타날까 우려한 것이다.
정 후보는 이날 밤 늦게 선거사무실에서 마무리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시계는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면서 그는 "동작을 위해, 서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뛰고 또 뛰겠다"고 말했다.
정녹용 기자 정상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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