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61) 전 서울대 총장(현 경제학부 교수)이 야구해설가로 깜짝 변신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를 좀 아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떠오른 부사는 ‘드디어’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야구선수를 꿈꿨고, 서울대 총장 시절에도 퇴임 후 거취를 물으면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꿈이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하던 그였다. 소문난 야구 마니아인 그는 지금도 좋아하는 두산베어스의 경기를 보기 위해 1년에 20여회 야구장을 찾는다.
야구 해설가 데뷔를 앞둔 정 전 총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대 연구실로 찾아갔다. 지난해 일거수 일투족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곤란한 시간들을 겪었던 그는 또 괜한 오해를 사는 것 아닌가 우려했지만, 야구에 대한 그의 애정과 식견은 장구한 이력이 증명하는 것이어서 중의적으로 해석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누가 학자 아니랄까봐, 그의 책상 위에는 <운명의 9회말> , <야구의 추억> 같은 야구 관련 서적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야구의> 운명의>
_야구책들이 굉장히 많으시네요.
“해설하려면 공부를 해가야죠. 준비를 많이 해야 해요. 다행히 거기 이병훈 해설위원이 따로 있고, 나는 특별 해설위원이에요. 아마 나하고 토크쇼 하려는 것 같애.(웃음)”
_그래서 공부 좀 하셨어요?
“물론. 마침 올해가 연구년이라 시간 여유가 좀 생겼어요. 이 책들은 옛날에 다 읽은 것들이고.”
누렇게 바랜 책장을 들춰보니 주격조사가 잘못 붙어있는 목적어에 검정 수성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것이 그의 꼼꼼한 성격을 보여준다.
_야구 해설 하신다니까 주변에서 뭐라고들 하세요?
“신선하다는 평도 있고, 교수가 무슨 외도 하냐(웃음) 하는 분들도 있고.”
_가족들은요?
“우리 가족들은 내가 신문에 자주 나는 거 싫어해요. ‘또 났어 신문에!’ 그러면서 놀리는 거야. 왜 이렇게 자주 신문에 나냐고 해서, 신문이 내는 걸 내가 어떡하냐, 내가 선전했냐 그랬죠.”
_야구가 왜 그렇게 매력적일까요?
“제가 살던 동숭동에서 애들이 야구를 많이 하면서 놀았어요. 인생의 대부분이 우연으로 이뤄지듯이 저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 거죠. 이론적으로 야구는 10대 0으로 지다가도 9회말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에서 이길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미래를 예측하기가 참 힘든 스포츱니다. 인생처럼요. 지다가 이긴다는 의미에서 패자부활전을 연상케 해서 참 좋다는 생각도 들고요. 다른 운동에 비해 개인기록과 단체기록을 함께 알 수 있는 점도 좋죠.”
_골프는 안 하십니까.
“안 배웠어요. 골프까지 하면 어떡해요.(웃음) 1년에 야구장을 스물 다섯번 가는데, 골프장까지 가면 난 공부 못하지요.”
얼마 전 김중수 청와대 경제수석은 인사 프로필 기사에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장승우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함께 경기고가 낳은 3대 천재로 불렸다”고 소개됐다. 경기중, 경기고, 서울대, 프린스턴대학원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 전 총장에게 물었다.
_3대 천재 맞으십니까?
“그 두 사람은 맞을지 모르지만 저는 아니에요. 뭘 하면 대강 되고 그런 정도지, 내가 남들보다 머리가 좋다고는 생각한 적은 없어요.”
_기억력 굉장히 좋으시잖아요. 사람이름이나 전화번호도 아주 잘 외우시고.
“그 방면에는 내가 괜찮은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머리는 기억하는 머리도 있고 분석하는 머리도 있고, 여러 측면에서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전 정말 머리 좋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몰아친 영어광풍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영어몰입교육을 하니 안 하느니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고, 발빠른 사교육 시장은 영어 없이 성공 없다는 악담에 가까운 홍보로 가난한 부모들을 슬프게 했다. 영어가 계급의 문장(文章)이 돼버린 시대다.
_영어몰입교육에 찬성하십니까.
“영어는 못 하는 것보단 잘하는 게 좋은데, 국어와 영어 중 어느 게 더 중요하냐고 물으면 국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대체로 국어를 못하면 영어를 잘하기 힘들기 때문에 먼저 국어나 제대로 하고 영어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거죠. 영어에서도 스피킹(말하기)과 리스닝(듣기)보다는 리딩(읽기)과 라이팅(쓰기)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스피킹과 리스닝을 굉장히 잘해야 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리딩과 라이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영어몰입교육, 소위 말해서 어떤 과목을 영어로 강의해야 한다는 건 굉瀁?중요한 전제가 필요한데, 우선 가르치는 사람이 그 과목을 굉장히 잘할 뿐만 아니라 영어도 잘해야 한다는 겁니다. 둘 중 하나라도 안 되면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말로 강의하는 게 좋아요. 자꾸 영어, 영어 강조하는데, 그래서 영어공용화를 하자는 말까지 나오는데, 그럼 2020년 가서 중국이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이 되면 그땐 중국어공용화를 해야 되느냐, 중국어 몰입교육을 해야 하느냐,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_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 ‘오렌지’를 ‘어린쥐’로 표기하자고 해서 비판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래서 농심 새우깡에서 ‘어린 쥐’가 나왔다고 하던데요.(웃음) 농담입니다.”
교육자율화가 신조이신데, 새 정부의 교육정책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대학교육협의회로의 입시 권한 이전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요.
“대학은 투자를 토양으로, 자유를 공기로 삼아 성장하는 곳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대학에 자율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대학업무, 그 중에서도 입시업무를 과거 교육부에서 대교협으로 넘기는 모양인데, 대교협은 제가 보기엔 아직까진 굉장히 루스한(헐거운) 기관이기 때문에, 잘못하다간 제2의 교육부가 될 수도 있고, 또는 상당히 무질서해질 수가 있습니다. 대교협에서 대학입시를 만든다고 하는데, 뭘 만든다는 겁니까, 각 대학에 맡겨야지. 몸무게로 뽑건 키로 뽑건 수능으로 뽑건 각 대학으로 넘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정치 얘기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봄, 그의 대선 출마 여부는 한국정치의 가장 첨예한 이슈였다. 치열했던 망설임 끝에 정치의 길목에서 교수의 자리로 되돌아왔지만, 불출마 선언 이후에도 그의 이름은 여전히 뜨겁게 정치의 많은 자리에 호명된다.
_가장 많이 들으셨을, 곤란한 질문들을 좀 하겠습니다.
“뭐, 대선 왜 그만뒀냐고요?(웃음) 너무나 뻔한 건데 뭘. 중학교 시절부터 저를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돌봐주신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라는 분이 계세요. 스코필드 할아버지는 어린 제게 ‘운찬, 정치는 하지 말아라. 거기는 깨끗한 곳이 못 된다. 그러나 건설적 비판은 해라. 특히 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으면 몸과 마음을 바쳐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가 한국이 굉장히 위기에 빠져있는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비교적 소극적인 사람이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안 한단 말은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안 한단 말을 한 2개월 반 동안 안 하면서 좀 우유부단하게 보였을 거예요. 그 두 달 반 동안 고생을 했는데,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정치를 하려면 우선 정치적 집, 정당이 있어야 하는데, 한나라당이건 열린우리당이건 기존 정당은 다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럼 새로운 집을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연구를 부탁했더니 돈도 많이 들고 조직도 많이 필요하다고 그러데요. 2007년 봄 시점에서 나한텐 벅찬 일이구나 싶어 4월 30일 깨끗하게 관둔 거예요. 아주 심플 스토리죠.”
_그 불출마 선언은 17대 대선에 한정된 건가요, 아니면 정치 일반에 적용되는 건가요? 앞으로 정치를 할지 여부가 관심입니다.
“지금 정치할 계획은 없어요. 지금이라는 표현 때문에 사람들이 우유부단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 말은 사람 앞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단언은 안 한다는 뜻이에요.”
_그런 막연한 원칙론적 차원에서 가능성을 열어두시는 건가요?
_“원칙론적 차원에서도 계획이 없어요. 학교에서 정년을 하는 게 목표예요.”
_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의 인수위원장부터 국무총리, 통합민주당의 비례대표 등으로 끊임없이 거론되셨습니다. 실제 제안을 받으셨습니까.
“말씀하신 자리에 대해 직접 전화를 받은 건 없고 제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얘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경우에 내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내 일생을 학교에서 살았는데, 학교를 떠날 준비가 안 돼 있다.”
_그럼 준비는 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하하하. 그럼 능력이 없다는 말로 바꿀게요. 준비 안됐다고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까, 학교를 떠날 준비는 안 돼 있다, 정치를 할 능력은 없다, 이렇게 답변할게요. 우리 같은 사람은 그거(정치인) 되기 힘들어요. 방대한 조직을 갖고 때로는 내 소신과 원칙에 어긋나는 비도덕적인 일도 해야 되는데, 못하죠.”
_그 과정에서 상처 받으셨나요?
“상처보다도…, 정운찬은 일을 잘할 건가, 못할 건가, 이런 식으로 좀 해야지, 오늘 나올 건가 안 나올 건가, 우유부단하다, 또 내가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미국에서 오지 않았다고 불효라고 한다든가, 김승연 한화 회장이 나한테 돈을 줬기 때문에 폭행사건을 문제 삼았다, 내가 세컨드가 있다, 일곱 살, 열두 살 난 아이가 있다…, 아이고, ‘잘들났다’ 했어요. 참, 너무하다 싶었죠. 사회가 사람을 키워주지는 못할망정 떡잎부터 잘라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_그런 일 겪어본 게 처음이시죠?
“처음이죠. 어렵더라구요. 저는 남한테 뭐 욕 먹고 살진 않았거든요, 거의. 정치권도 이제 입문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막 죽이면 어떻게 해. 좀 키워놓고서 죽여야지.(웃음) 한국 사회가 사람을 키울 생각은 안 하고 죽일 생각만 하는구나 싶어 안타까웠어요. 하지만 세상이 그런 거죠.”
_이런 저런 분석들이 추후에 많이 나왔잖아요. 그중 불출마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학자적 자존심이 권력의지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나갔어도 흉보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예요. 만약 내가 나갔더라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학자가 권력욕으로 꽉 찼구만’ 이랬을 겁니다. 안 나가니까 ‘학자라 권력의지가 참 부족하구만’ 이러고요. 어떻게 하든 욕 먹는 거야. 학자적 자존심은 어려운 단어고, 야, 이게 무슨 이런 판이 있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_여야,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영입의 러브콜을 보내오는데, 스스로는 자신의 정치적 좌표가 어디라고 보십니까.
“난 항상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객관적으로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에 기초해서 비판을 받는 사람은 ‘저거 우리 적이구나’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김영상 정부 때는 비교적 보수적 정부니까 ‘저거 진보적이구나’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비교적 진보적인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도 쭉 비판하니까는 ‘옛날에는 괜찮았는데 보수구나’ 그랬는데, 저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고, 객관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전 극단적 시장주의는 싫어요. 경제학자로서 시장을 믿지만, 시장은 깨지기 쉽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케인스주의자라고도 불리는데, 다 떠나서 객관적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했다고 자부합니다.”
_특히 새 정부 출범 직후 인사 잡음이 많았는데요, 전에 노무현 정부 때도 코드인사라고 그렇게들 말이 많았는데, 도대체 인사의 어려움이라는 게 뭘까요.
“제가 서울대 총장을 할 때 가까이서 함께 일한 스태프가 30여명 되는데 그 중 서울대 교수의 6분의 1은 된다는 경기고 출신은 3명뿐이었습니다. 무슨 형평을 맞춘 것이 아니라, 다양성 추구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인사를 할 때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와야 하는데, 다양한 사람을 데려오려면 다양한 사람한테 물어봐야 돼요. 이명박 정부도 코드인사를 했다고 하는 일반적인 평가에 저도 동의하는 편입니다. 인사는 다양하게 해야 합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공유해야 새 생각, 창의적인 생각을 할 수 있어요.”
_이번 대선 때 투표하셨습니까.
“물론이죠.”
_누구 뽑으셨나요?
(웃으며) “밸런스를 맞춰서 했어요.”
_외람되지만 여쭙겠습니다. 주변에 그런 평들이 많은데, 스스로 순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난 정말 계산을 못해요. 그래서 정치하기 힘들어.”
_그 점이 마음에 드시나요?
“육십이 넘어서 그런 말을 듣는 게 부끄럽지만, 그렇게 살고 싶어요.”
박선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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