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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호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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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호민관

입력
2008.03.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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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34년 7월, 29세의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로마의 호민관에 출마해 당선됐다. 호민관이 된 후 그가 한 연설은 시민들의 가슴을 깊이 파고 들었다. “들짐승과 날짐승도 저마다 보금자리가 있다. 그런데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로마 시민들에게는 햇볕과 공기밖에 없다. 로마 시민은 승리자이지만, 자기 것이라고는 흙 한 줌 갖고 있지 않다.”

그라쿠스는 농지법을 개정해 전장에서 돌아온 무산자들에게 국유지를 임차해 주고, 귀족계급인 원로원 의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임차한 농지를 반환토록 해 이들에게 분배했다. 농지를 빼앗기게 된 원로원이 반발, 그라쿠스를 타도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

▦그라쿠스는 개혁 완수를 위해 재선에 도전했지만, 이듬해 7월 선거일에 원로원 지지파에게 붙잡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갑자기 대국으로 커진 로마의 빈부격차 문제를 해소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호민관은 평민집회 소집권과 정책 입안권, 거부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이를 통해 평민의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입안했으며, 원로원 결의 등이 부당할 경우 이를 거부했다.

▦요즘 물가 급등으로 고민 중인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한은의 역할을 호민관에 비유했다. 이 총재는 “한은은 물가 안정을 통해 호민관 역할을 잘 해야 한다”면서 “물가를 안정시키면 가장 큰 혜택을 보는 사람은 서민”이라고 강조했다. 호민관이 로마 평민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듯이 한은도 서민 생활 안정에 힘써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이다.

이 총재는 역대 한은 총재 중 손꼽히는 매파로 통한다. 한은이 관료들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철학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파트너인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도 소문난 강경파다. 소신이 뚜렷해서 ‘강고집’으로 불리운다.

▦요즘 ‘이 배짱’과 ‘강 고집’이 금리와 환율 문제를 놓고 샅바싸움을 벌이고 있다. 강 장관은 한은이 책임 없이 권한만 누리는 고립 속의 유아독존에 머물지 말고, 성장과 경상수지를 위해 금리 인하와 원화 약세가 필요하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 반면 이 총재는 물가안정이 중요하다며 경제팀의 요구에 요지부동이다.

금리 인하가 정권엔 득이 될지 몰라도, 서민의 삶엔 독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호민관이 원로원의 결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듯이, 서민경제의 파수꾼 소임을 다하기 위해 ‘강 고집’과 기싸움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이 총재의 결기가 느껴진다.

이의춘 논설위원 e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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