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세상에 이것보다 더 질긴 이데올로기가 있을까. 근대성이 무너지고 신이 조롱거리가 됐지만, 최소한 겉으로는, 가족이라는 신화는 건재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아방가르드라도 함부로 걷어차지 못하는 게 가족 이데올로기였다. 예수를 변태로 그릴 수 있어도 어머니는 거룩한 존재여야 했다.
하지만 이제 아니다. 영화 속에서 가족은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할 성역이 아니다. 컬트영화가 아니라 대중성을 갖춘 상업영화 이야기다. 딸의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거나 엄마에게 섹스용품을 선물하는 영화들이 버젓이 박스오피스 순위를 다툰다. '터부'나 '불륜' 딱지도 필요 없다. 그냥 그런 모습들이, 영화가 바라보는 오늘날 '가족'이다.
4차원 가.족.의.탄.생.
27일 개봉하는 <동거, 동락> (감독 김태희)은 두 가족이 하나의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가족으로 융합(?)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 사람씩 뭉친 네 식구에 불과하지만, 이 새로운 가족의 가계도는 2차원 평면에 그리기가 심히 힘들다. 이들의 아리송한 관계를 한번 들여다보자. 동거,>
일단 '나'는 마흔 여덟의 이혼녀 정임(김청)이다. 한 사람이 서서히 다가오는데, 그는 20여년 전에 나를 버렸던 '남자'다. 역시 이혼한 그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다. 그냥 그 정도면 좋을텐데, 며칠 전 호스트바에서 만나 원나잇을 보낸 '놈'이 바로 그 아들이다. 게다가, 그 놈이 딸의 '애인'이다. 가계도를 긋는 선이 어쩔 수 없이 3차원 벡터가 된다.
영화는 잠시 신파의 길로 접어드는 듯하다, 무척 '쿨'한 결말을 향한다. 한 커플이 '결합'하고 다른 커플은 '정리'할 거란 예상을 경쾌하게 벗어난다. 영화는 복잡한 호적 정리 없이, 한 집에 이삿짐을 부리는 네 사람의 모습을 비추며 마무리된다. 스물 다섯 살 감독의 당찬 얘기. "누구랑 자느냐보다 왜 자느냐가 중요하지 않나요? 사람들이 한 집에 모여 사는 것도 마찬가지겠죠."
4월 10일 개봉하는 <경축! 우리사랑> (감독 오점균)은 조금 더 발칙하다. 노래방과 하숙집을 운영하는 봉순(김해숙)은, 자신의 딸에게 버림받은 스물 한 살 연하에게 연민을 느낀다. 토닥이며 위로하다 정이 들고, 하룻밤을 보낸 뒤 덜컥 임신을 한다. 그러나 정임에게 찾아온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환희다! 경축!>
이 어처구니 없는 사태는 가족의 테두리에 있던 모두를 변화시킨다. 봉순을 소 닭 보듯 하던 남편은 억장이 무너지고, 그러거나 말거나 봉순은 새 사랑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교성이 배어나오는 문 밖에서 봉순의 남편이 딸에게 속삭인다. "지금은 엄마가 밉겠지만, 이해해야 돼. 어쨌든 우리는 가족이잖아."
13일 개봉한 일본 영화 <새드 배케이션> (감독 아오야마 신지)은 비슷한 소재를 하드코어 버전으로 풀어낸다. 세상의 모든 불행을 짊어진 듯한 켄지(아사노 타다노부)는 밀입국하다가 아버지를 잃은 아춘을 데려다 기른다. 새드>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새 남편으로부터 일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켄지가 취직한 이유는 복수를 위해서다. 그는 이복동생을 죽인 뒤 교도소에 갇힌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춘도, 켄지의 아이를 밴 여인도 모두 거두어 함께 산다. 켄지를 면회하며 어머니는 얘기한다. "다들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우린 모두 가족이니까."
그래도, 좋.지.아.니.한.가(家).
영화에서 '가족=아버지+어머니+자식+…'이라는 공식이 깨진 것이 처음은 아니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 (2003년)은 가족도 얼마든지 '헤쳐 모여'할 수 있는 집단임을 일깨웠다. 바람난>
장선우 감독의 <귀여워> (2004년)에서는 아버지와 이복형제들이 한 여인을 두고 쟁탈전을 벌였고,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 (2006년)에서는 이른바 '정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난 가족도 충분히 행복했다. 달라진 점은 작가주의 영역에 가까웠던 이런 주제가 점점 대중화한다는 것이다. 가족의> 귀여워>
가족이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보수적인 테마를 영화가 비틀고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일단 급격히 해체되는 가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혼과 혼외관계가 일상화한 시대에, 가족만 봉건시대의 유물로 묘사하는 것이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4차원 가족'에 대해 관객들이 더 이상 거부감을 갖지 않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가족으로 표상되는 체제, 권력관계를 해체하려는 작가의 시도라는 분석도 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씨는 "물신화한 사회, 자본으로 강박된 관계에 대한 반발"로 이런 유의 영화를 평가했다.
그는 "현대의 가족 형태도 결국 자본주의 체제가 이식한 인간 관계"라며 "현대인을 짓누르는 권력과 자본 등 각종 억압 기제들을, 가족이라는 기초 단위를 건드?깨 부숴보려는 작가들의 의도"라고 영화 속에서 형해화하는 가족을 설명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