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전 11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남중빌딩 한국미래당사에 한나라당 터줏대감 몇 사람이 나타났다. 모두 독립투사 같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맨 앞에 서 있던 서청원 전 대표가 마이크 쪽으로 다가섰다.
“오늘 한나라당을 떠납니다. (친이명박 측은) 지난 10년 고통스러운 야당 생활을 같이 해 온 동지들(친박근혜 측)을 몰아내고, 철새 정치인과 함량 미달의 충성서약자들로 당을 채워 놓았습니다. 저희는 대충 당 원로로 대우받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다시 맨 주목 불끈 쥐고 광야로 나갑니다.”
그 이름도 망측한 ‘친박연대’는 친박 측 공천탈락자들과 원로들로 이렇게 시작됐다. 이들은 기자회견 직후 한국미래당을 친박연대로 바꿨고, 4ㆍ9총선에서 목숨을 걸고 한나라당을 바로잡겠다고 천명했다. 지명도가 높아 무소속으로도 생존이 가능하다고 판단하는 다른 친박 측 공천탈락자들은 ‘무소속연대’를 표방하면서 선거에 나서게 됐다.
친박연대는 한국정치를 3류 코미디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이들은 박 전 대표와 친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정당이 무슨 친목회 조직이란 말인가. 유력자와의 안면을 중심으로 정당이 운영되는 것은 한국 정치의 고질이지만 아예 유력자의 이름을 내건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무소속연대도 친박을 깃발로 걸었다는 점에서 같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런 한심한 상황을 초래한 책임은 1차적으로 친이 일변도의 승자독식 공천을 한 한나라당과, 비상식적 공천에 극히 비상식적 방식으로 대항한 친박 측 공천탈락자들에게 있지만 박 전 대표에게도 문제는 있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공천 파동이 일자 자기 계파 소속 공천탈락자들을 만나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23일에는 공천 실패를 이유로 지도부 사퇴를 요구하고 한나라당 지원유세 불참을 천명한 뒤 24일 자신의 선거운동을 위해 대구로 갔다. 친박연대 등과 대놓고 함께 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을 적극 돕지도 않겠다는 전술이다.
23일 자신의 지도부 사퇴 요구에 강재섭 대표가 “총선에 불출마하고 선거 결과로 평가받겠다”고 대응했지만 박 전 대표는 “내가 말한 것과는 무관한 얘기”라며 이 같은 애매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전술은 친박연대 등의 저질 정치가 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는 점에서 최악의 선택이었다.
잔류와 탈당 사이에서 정치적 이익을 재는 듯한 모습은 원칙을 지향해 온 박 전 대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단 정당에 속해 있다면 그 당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는 친박연대 등을 인정하지 말아야 하며, 한나라당 지원유세에 누구보다 열심히 나서야 한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당당한 모습은 그에 대한 높은 국민 지지도와 상호작용하면서 당내 중립 의원은 물론, 친이 의원들까지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이다. 이 전술은 결국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는 방도니 최상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화끈하게 한나라당을 밀어 주지 못하겠다면 애매한 입장에서 최소한의 저항만 하면서 공천 문제로 불만을 터뜨리지 말고 그냥 한나라당을 떠나라. 배신했다는 비판은 받겠지만 결혼하고 또 이혼하는 것이 인간사라는 점에서 지금의 애매한 모습보다는 나을 것이다.
이은호 정치부 차장 leeeun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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