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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 정홍택, 한가락 하던 선배 많은데 연예 기자 1호 된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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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연예기자 1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 정홍택, 한가락 하던 선배 많은데 연예 기자 1호 된 사연은?

입력
2008.03.24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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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기자 1호.' 나한테 항상 붙어 다니는 별칭이다. 내가 어째서 1호일까? 내 선배들이 많이 계셨는데, 사람들은 왜 나를 1호라고 부르는 것일까? 우선 기라성 같은 선배기자들을 소개한다면, 동아일보의 호현찬, 안병섭, 한국일보의 이명원, 임영, 손기상(훗날 중앙일보), 조선일보의 임영웅, 정영일, 이흥우, 이구열, 서울신문의 신우식, 대한일보의 황운헌, 정인섭, 경향신문의 김진찬씨 등이 대활약을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연예기자 1호'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을까? 나, 자신도 사실 궁금했다. 그래서 이리 저리 따져보니까, 나름대로 이유는 있는 것 같았다. 그 하나는 위에 소개한 선배들은 문화부기자로서 영화, 연극, 무용, 미술 등 다양한 장르를 폭넓게 담당하고 계셨을 뿐, 흔히 "딴따라"라고 불리우는 가요계나 방송(라디오, TV)계 취재를 하지 않았던 것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연예부라는 부서를 창설한 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한국일보에 연예부를 창설할 것을 내가 제안했다. 그 당시 장기영 사주에게 제안한 이유는 한국일보, 서울경제신문, 주간한국, 일간스포츠 등 자매지 포함하여 모든 매체가 연예기사를 다루고 있었는데 한 가지 기사를 가지고 제각기 다른 내용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통일하자는 뜻이었다.

즉시 장사주께서 결정을 내렸고, 이명원씨가 초대부장이 되었으며, 내가 차장이 되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 제안이 그렇게 빨리 결정이 날줄은 몰랐다. 그런데 장 사주께서는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을 제일 싫어 하셨기 때문에 쉽게 결정이 난 것으로 생각된다.

장 사주를 우리 기자들은 '왕초' 라고 별칭 했다. 어찌보면 좀 버릇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장사주 당신께서도 이 별명을 좋아 하셨다. 그 왕초의 결단으로 다른 어느 신문 보다 먼저 연예부가 창설 된것이다.

그 당시 연예부에는 이명원부장, 정홍택차장 그리고 기자로서 이봉운(이봉춘), 최재웅, 원형걸, 김유생, 정의명, 정정숙씨 등이 있었다. 이명원선배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기자로서 활약을 했고, 대학때 전공인 정치(서울대 정치학과)와는 전혀 동떨어진 문화부기자로서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나는 이 선배와 여러 가지 추억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부동산 관련이다. 어느 날 이 선배가 나한테 경기도 평택 근처에 있는 둔포(아산군)에 농장을 보러 가자고 했다. 마침 나는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차로 둘이서 둔포에 갔다.

그 당시(1965년)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을 했고, 중요한 정부요직에 있던 김모씨가 소유한 목장이 있었고, 그 옆의 땅을 나와 함께 사자는 것이 이 선배의 제안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재에 밝지 못하다. 아니 아예 숙맥이다. 숙맥이란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인데 나는 정말로 이재에 관하여는 콩과 보리를 구별 못하는 모양이다.

땅이야기를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그 땅을 구입하지 않았고, 이명원선배는 과감하게 사들였다. 물론, 그 당시 가격으로는 그렇게 비싸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매우 후회가 되었지만, 별수 있겠는가?

연예부 기자중에 이봉운씨는 나중에 영화평론가협회 회장도 지내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영화계에 많은 지인들이 있으며, 훗날 내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의장을 할 때에 자주 만나기도 했다. 최재웅기자는 방송출입을 했는데, 타고난 유모어 기질로 좌중을 즐겁게 했으며, 지금은 미국 LA에 살고 있다.

원형걸기자는 방송계와 가요계를 누비고 다녔는데, '레이다망'이 넓어서 연예계 인물들의 생활 이야기를 도맡아 쓰기도 했다. 얼마 뒤 선데이서울로 옮겨서 진가를 발휘하더니, 지금은 KBS-TV의 '가요무대'라는 프로그램의 자문위원인가를 맡고 있다. 그러니까 아직도 현역인 셈이다.

김유생기자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경기고와 고려대를 나와서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봉봉 사중창단이라는 남성4인조 보컬그룹의 멤버가 되어 노래를 불렀다. 미남형에다가 항상 웃는 모습이었고, 대인관계가 아주 좋았다. 이승만 정권때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신익희선생의 외손자였는데, 신문기자 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하도 조르는 바람에 내가 강력히 추천해서 연예담당기자로 일 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일보에 입사해서 그 당시 편집부에 기자로 있던 송리라씨(국회의원 송원영씨의 딸)와 연애결혼을 했다. 그러다가 문공부의 공보관으로 발탁되어 기자생활을 접고 핀란드 공보관으로 부임하여 근무중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의명씨는 아주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편이며, 바둑을 잘 두었다. 정정숙씨는 조선일보에 있던 유명한 영화평론가인 정영일씨의 막내 여동생으로 대단한 미모였고, 지금은 캐나다에 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들이 연예기자 1호라고 부르는 이유 세 번째로는,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끼'가 아닐까 싶다. 나는 원래 대학에서 영어와 국제관계학을 복수전공했다. 그리고 한국일보에 입사해서 정치부 기자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신문기자의 운명은 재천(在天)이 아니라 재국장(在局長)이었다.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홍유선 국장이 "기자는 사회부가 꽃이야"하면서 사회부로 보냈다.

사회부 기자를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었고, 훗날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내게 되는 이원홍 사회부장이 "너는 사회부 깜이다."라고 찜을 했는데, 영어 좀 한다는 이유로 외신부(지금은 국제부)로 가게 되었다.

역시 훗날 국회의원이 되고, 정계 거물이 되는 조세형 외신부장이 나를 끌고 갔는데, 그 바람에 두 분이 편집국 안에서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를 목격하게 된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 마침, 사회부에 있던 동료기자가 내 귀에 대고, "정형, 이럴 때 두 군데 다 빠지고, 정치부로 가지 그래요!"라고 소근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그땐 말을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하! 이런 것이 세상 사는 방법이구나!"하고 느껴진다. 어쨌든, 한바탕 소동 끝에 나는 외신부 기자가 되어 사흘에 한번씩 밤을 꼬박 세우는 강행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쯤 김성우 선배와 이명원 선배가 교대로 나를 찾아와서 '주간한국'으로 오라는 말을 했다.

▲ 약력

'연예기자 1호' 정홍택씨는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폭넓은 활동을 해왔다. 1963년 2월에 한국일보에 견습기자로 입사한 후, 사회부, 외신부, 문화부 기자를 거친 뒤 국내 최초의 종합주간지인 '주간한국'이 창간되면서 본격적인 연예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예술의 전당 운영국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사무처장과 영화심의의장, 한국영상자료원장, 국제영상자료원연맹 부회장 등을 역임했고, 중앙대 겸임교수, 상명대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저작권보호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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