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로프 발레 예술감독 출신의 거장 올레그 비노그라도프가 유니버설발레단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에는 러시아 고전발레 소품을 갈라 형태로 소개하는 공연이 많았다. 필자도 열심히 그런 기회를 쫓아다녔는데 어느 날 한 무용수가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 큰 키(174㎝)와 서구적 마스크 때문이었다.
그가 임혜경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주역을 맡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9년 연말에 한 유선방송에서 유니버설발레단의 <라 바야데르> 를 방송한다는 걸 알고 TV 앞에 앉았다가 어느새 훌쩍 성장한 임혜경을 보게 되었다. 그때의 놀라움은 잊지 못할 것이다. 라>
연인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맞이한 인도 무희의 슬픔을 놀라운 표현력으로 소화하는가 싶더니 ‘망령의 왕국’이라 불리는 유명한 피날레에서는 극도로 유장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어느 세계적 발레리나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연기였다.
아쉬웠던 점은 <라 바야데르> 로 각광을 받고 한창 물이 오를 시점에 미국 연수와 임신 등으로 상당한 공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2004년 봄의 <라 바야데르> 리바이벌 무대였다. 출산 4개월 만에 춤을 춘 것이었으니 몸에 여러 무리가 있었을 텐데도 지난날의 감동을 재현했다. 라> 라>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지젤> 을 추었는데, 필자가 본 수많은 <지젤> 중에서 가장 실감나는 광란의 장면이 펼쳐졌고, 2막에서 연인 알브레히트와 생사를 넘어 추는 2인무에서는 눈물이 날 정도였다. 뛰어난 연기를 넘어 영적인 표현을 하는 발레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젤> 지젤>
임혜경은 많은 팬을 몰고 다니는 대중적 스타는 아니다. 파트너를 제한해야 할 정도로 키가 큰 데다가 대단한 테크니션은 아니기 때문에 아무 작품에서나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사실 <돈키호테> 의 키트리,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의 오로라 공주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라 바야데르> 와 <지젤> 만큼은 최고이고, 필자는 볼 기회가 없었지만 <백조의 호수> 에서도 대단하다고 한다. 백조의> 지젤> 라> 잠자는> 돈키호테>
현재 임혜경은 37세로, 발레리나로서 은퇴를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됐다. 그가 지닌 극적 표현력과 서구적 자태라면 안무가 존 크랑코나 케네스 맥밀란의 드라마 발레에서도 빛을 발했을 텐데 국내 무대에 머문 바람에 아예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이 크게 아쉽다
. 5월로 예정되었던 <라 바야데르> 가 예술의전당 화재 탓에 내년으로 미뤄진 것도 팬들을 초조하게 만든다. 대신 공연된 <지젤> 을 22일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보았다. 가슴을 파고드는 표현력으로 승부하는 발레리나이기에 감동은 여전했다. 아무쪼록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임혜경의 춤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젤> 라>
음악공동체 무지크바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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