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 그르니에 지음ㆍ김화영 옮김현대문학 발행ㆍ222쪽ㆍ1만원
프랑스 원로 소설가 로제 그르니에(89)가 2006년 발표한 단편집으로, 총 10편이 수록됐다. 간결한 문장들로 이뤄진 단편들은 10쪽이 채 안되는 소품에서 40쪽 남짓 넉넉한 작품까지 들쭉날쭉한 분량으로 작품집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표제작은 파리의 건축 설계사 '뤼도빅'이 애인을 만나러 클레르몽페랑에 다녀오는 이야기다. 2차대전 중이라 만원 승객에 연착도 잦은 기차 여행길에서 뤼도빅은 남편이 독일군 포로가 돼버린 매력적인 여성 '사빈느'를 만난다.
서로의 연정을 확인하고도 갈림길에서 그녀와 작별하고만 뤼도빅을 맞은 것은 애인과 그녀의 새 동거남이다. 눈물을 흘리며 고단한 여정을 되밟는 그의 머릿속은 "그녀(사빈느)를 내려올 때가 아니라 돌아갈 때 만났더라면…"(46쪽) 하는 부질없는 회한으로 그득하다.
이와 비슷하게, 짝사랑하는 여인을 놀래키려 그녀의 정원에 몰래 찾아든 단편 '초당'의 주인공 역시 눈앞에 펼쳐진 환멸의 광경에 넋을 놓고 만다. '난처한 일'의 여주인공 상황은 더욱 난처하다. 마흔 다 되도록 기다려왔던 이상형 남자가 하필 유부남이라, 그녀는 그와 늘 가까이 있겠다는 일념으로 남자의 절친한 사촌-형편없는 인격의 소유자-과 결혼한다. 남편을 설득해 남자 부부와 함께 살 큰 집까지 빌려놨건만 난데없는 부고가 날아든다.
작가의 생물학적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게 다채로운 이야깃거리와 속도감 있는 전개로 무장한 단편들은 결국 삶의 비애를 종착역으로 삼는다. 미모의 간호사와의 농지거리에 정신이 팔린 인턴의사에게 마취도 못한 채 상처 봉합을 맡긴 늙은 남자가 등장하는, 언뜻 한 편의 소극처럼 보이는 '한 시간 동안의 바느질'조차 종지부에선 짙은 페이소스가 풍긴다. 작가가 단편 여럿의 배경을 2차대전 무렵으로 설정한 것도 삶에 대한 이런 비극적 인식과 무관치 않을 테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