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미술계는 오랜만에 활력이 도는 모습이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첫째, 미술관을 번쩍거리는 관광 상품으로 전환해 문화적 불모지를 양산한 죄인인, 구겐하임미술관의 토마스 크렌스가 관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활력의 두 번째 이유는, 에스테로더사의 회장 레너드 A. 로더가 재정난에 시달리던 휘트니미술관에 1억3,100만 달러를 기부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간 풍문으로 나돌던 휘트니미술관 건물(마르셀 브로이어의 디자인)의 매각설이 진화됐다.
세 번째 이유는, 미술시장의 거품이 주저앉으면서 다시 세인들의 관심이 좋은 전시로 몰리기 때문이다. 현재 열리고 있는 여러 기획전 가운데 가장 큰 호응을 얻는 것은 뉴욕현대미술관의 <컬러 차트> 다. 이미 작년 초부터 주목을 받은 이 기획은, 1950년대 이래 ‘색상’이라는 주제가 어떻게 현대미술에서 다뤄져왔는가를 돌아본다. 컬러>
큐레이터 앤 템킨이 작성한 전시의 연보는, 1918년에 제작된 마르셀 뒤샹(1887-1968)의 마지막 유화 <나는 너를> (Tu m’)을 레퍼런스로 제시한 뒤, 이브 클라인, 존 체임벌레인, 게르하르트 리히터, 제니퍼 바틀릿, 존 발레사리, 마이크 켈리 등을 거쳐 짐 람비(b. 1964)에 닿는다. 나는>
그런데 거성들이 망라된 전시라고 해도, 가장 돋보이는 작업은 따로 있는 법. 새삼스레 위대해 뵈는 작품은 바로 엘즈워스 켈리(Ellsworth Kelly, b. 1923)의 1951년작 ‘큰 벽을 위한 색상들’(Colors for a Large Wall)이다. 켈리는 “회화성에 단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인 바 없다”고 단언하는 전후 현대미술의 선구자다.
다른 작가들이 ‘개성적인 필치로 예술성을 표현하는 데’ 몰두하는 동안, 그는 작가의 주관성을 제한하고자 애썼다. 동시대를 누빈 추상표현주의자들과는 상반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큰 벽을 위한 색상들’은 64개의 작은 캔버스를 8×8의 형태로 배열한 작품으로, 모든 캔버스는 가로와 세로가 30㎝인 정사각의 형태고, 각각 하나의 색상으로 칠해져있다. 이 색상들도 작가의 주관이나 감성과는 무관하다. 문구점에서 파는 색종이의 색상을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각 색상을 배열하는 것도 마치 바닥의 타일 공사를 하듯 임의적 선택을 따랐다. 따라서 이 작품은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을 예견하는 것 같지만, 레디메이드 색채의 데이터베이스를 전제한다는 점과 우연성을 관리하려 든다는 면에서 개념미술적 양상을 띤다.
양차대전 사이에 활동한 대개의 추상화가들은 색채를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상징으로 다뤘고, 그 영향은 전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됐다. 하지만 켈리의 작품에서 색상은 색상일 뿐, 무언가를 표상하지 않는다. 이러한 비주관적 태도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고, 다른 작가들이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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