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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 네 번째 시집 '세워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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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명 네 번째 시집 '세워진 사람

입력
2008.03.24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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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년 직장생활 동안 스타킹/ 신고 벗고를 매일 매끄러이/ 매미 날개 떼었다 붙였다 하는 것처럼/ 가볍게 착오없이 해내었던/ 내 손, 내 이 손이 틀림없는데/ 이제 음률이 흘러가지 않는다/ 매미 날개의 노래가 번번이 찢긴다’(‘손거스러미의 시간’에서)

이진명 (53) 시인이 네 번째 시집 <세워진 사람> (창비 발행)을 냈다. <단 한 사람> (2004) 이후 3년만으로, 46편의 시를 묶었다. 시적인 것을 찾아나서는 대신, 심상한 일상에서 시적인 것을 길어올리는 시인의 솜씨가 물이 올랐다. 가사에 치이다가 겨우 짬을 내 외출하려는데 손거스러미에 스타킹 올이 풀린 일을 시인은 ‘손거스러미, 아스라이/ 무슨 독인가를 밀어내고 있는/ 가슬가슬 손거스러미의 시간’(위의 시)으로 표현한다.

신문 기사도 시가 된다. 부인이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죽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중풍 노인의 사연을 읽은 시인은 우울한 맘으로 그 부인의 처지에 자신을 겹쳐보다가 깨닫는다. ‘그런 나를 눈물 머금고 바라만 보는 그 누가/ 거동 못하는 그 누가// 아, 눈물 머금은 신(神)이 나를, 우리를 바라보신다’(눈물 머금은 신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비루한 일상 너머 초월에 도달하는 시편이 이밖에도 여럿이다.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실크스카프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시인은 ‘모래사막, 뚠황 석굴의 석벽 가르며/ 천년이 넘도록 극채색의 고요히 빛나는 뱀’을 떠올린다. 이어 그 스카프가 ‘껍질조차 녹여내고/ 무늬만으로도 눈부신 생이 홀로/ 검은 길바닥의 화염 정적 먹으며/ 모래사막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상상한다(‘줍지 못한 실크스카프’).

“이번 시집을 엮으며 죽은 엄마와 외할머니, 얼굴도 생사도 모르는 이북의 이복 언니를 많이도 불렀다”는 시인. 최근 암벽타기에 취미를 들인 이후 쓴 ‘바위’ 연작엔 엄마, 외할머니, 은사인 고(故) 오규원 시인 등을 산바위에서 만나는, 생사의 경계를 뭉갠 시적 상상이 녹아있다. ‘숙인 파파머리 새치가 은실이네/ 반짝이 은실 예뻐 다가가 손대보려는데/ 풀린 파마머리 천천히 돌리는 엄마/ 무릎을 짚고 일어서는가 싶었는데/ 명경을 차버리고 돌풍같이 날아간 엄마/ 마흔일곱/ 오후 두시/ 엄마가 날아간 백암의 명경 너무 고요하네/ 제 얼굴을 한 금도 깨트리지 않았네’(‘바위-엄마’).

이훈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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