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냄새에 섞여 흐르는 달콤함을 좇아 배는 킁킁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꽃섬’ 풍도로 가는 배는 나른한 봄기운을 헤치며 해무 속으로 빠져들었다.
서해에 ‘꽃의 낙원’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몇 달 전이다. 일부러 가꾼 꽃밭이 아니라 수줍은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섬이 있다길래, 꼭 한 번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곤 그저 봄이 익어가길 기다려왔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출발한 왕경호는 작고 아담했다. 선실은 의자가 아닌 마룻바닥. 평일에 떠나는 섬여행길이라선지 배 안은 한산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께 여쭸다. “풍도에 무슨 일로 가시나요.” 서울서 왔다는 이영수(50)씨는 “꽃 보러 가지요. 작년에 처음 갔다가 홀딱 반해 1년을 기다렸어요”라며 웃었다.
이씨 같은 ‘꽃쟁이’들에게 풍도는 이미 유명한 곳인가보다. 잔잔한 바다를 가로지른 목선은 2시간 만에 풍도에 도착했다. 포구를 중심으로 50여호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전형적인 섬마을. 130여명이 거주하는 이 작은 섬은 인천서 배를 타고 들어오지만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 안산시 단원구다.
민박집에서 여장을 풀고 꽃구경을 나섰다. 함께 배를 탔던 꽃쟁이 이씨 일행이 고맙게도 꽃길을 안내했다. 시누대 우거진 마을 고샅을 돌아 산으로 올랐다. 500년 넘은 은행나무를 지나자 드디어 꽃밭이 화려하게 등장했다.
나무 밑에 한 다발씩 샛노란 복수초가 탐스럽게 피었다. 처음 만난 봄꽃이라 기쁨은 더했다. 열심히 사진을 찍고 산으로 오르니 복수초 옆으로 앙증맞은 노루귀가 두터운 땅을 뚫고 솟아있었다.
흰빛과 보랏빛의 손톱만한 꽃잎도 아름답지만 가냘픈 꽃대의 송송송 돋은 솜털, 거기 부딪는 봄볕이 더욱 매혹적이다. 그 옆에 피어난 꿩의바람꽃은 눈보다 고운 흰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땅바닥에 조심스레 무릎 꿇고 한참을 넋놓아 바라보았다.
봄꽃, 그것도 이처럼 키작은 꽃들이 유독 아름다운 것은 녹색의 풀이 아직 돋지 않은 황량한 무채색의 들판에 피어오른 첫 컬러이기 때문일 것이다. 꽃송이는 작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
산길을 타고 조금 더 올라 구릉에 도착하자 탄성이 절로 쏟아진다. 들판이 온통 꽃으로 가득했다. 발 디딜 틈 없이 들판을 덮은 꽃은 희디흰 변산바람꽃. 군데군데 피어난 복수초가 하얀 꽃장판에 노란 봄물을 찍어댄다.
아름드리 거목과 어우러진 꽃밭은 동화에 나올 법한 고풍스런 비밀의 정원이다. 전국의 웬만한 산은 다 돌아다녔다는 이종승(62)씨는 “야생화 군락지로 유명한 인제의 곰배령도 이곳에는 댈 게 아니다”라고 감탄했다.
온통 꽃지뢰다 보니 행여 꽃을 밟을까 한발 한발이 조심스럽다. 인공 식물원의 꽃밭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다. 자연이 부린 조화다. 얼굴엔 절로 웃음이 번지고,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향기 좋은 와인 몇 잔을 마신 듯, 풍도 꽃밭에 그만 취해버리고 만다.
해군부대가 있는 고갯마루에서 바다로 뻗어내려간 비탈에도 귀한 우리꽃들이 피어났다. 노루귀보다 더 작은 꽃망울의 새끼노루귀가 앙증맞게 인사했고, 풍도의 대표적 희귀 식물인 풍도대극이 마치 죽순 올라오듯 봉긋 땅 위로 솟았다.
몸을 숙이고 마음을 낮춰 만나는 키 작은 우리꽃. 풍도 꽃구경은 숲속의 행복한 보물찾기였다.
풍도=글ㆍ사진 이성원 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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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도의 시누대길엔 푸른 적막이…
산으로 꽃구경을 다녀왔으면 해안길을 따라 풍도 산책을 나서보자.
마을 왼편으로 돌아가면 우선 정자와 함께 비죽 튀어나온 갯바위가 시선을 끈다. 정자를 돌아서면 넓은 몽돌해변이 펼쳐진다. 한여름 실컷 해수욕을 즐길 만한 곳이다. 몽돌해변 끝자락 언덕에 하얀 등대가 서 있다. 해질 무렵 붉은 노을을 맞기 제격인 곳이다.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선 마을의 고샅을 헤매고 다니는 것도 풍도의 추억을 쌓는 좋은 방법이다. 아귀를 말리고 있는 빨랫줄, 푸른 그늘을 드리운 시누대길, 초등학생 3명이 다니는 아담한 풍도분교, 과자와 음료수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작은 가게 등.
마을 앞 바다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곳은 육도와 당진 땅이다. 풍도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육도 건너편 도리도라는 섬을 오가며 살아왔다. 김계환(67) 도리도 통장은 “도리도는 물이 없는 무인도지만 바지락에 낙지에 소라, 키조개 등 안 나는 게 없는 섬이었다”고 말했다.
겨울이 가까워오면 풍도의 전 주민들은 드럼통에 가득 물을 싣고는 이불, 쌀 짐을 싸들고 도리도로 건너가 바지락 등을 캐서 돈을 벌었다. 겨울 한철 이곳에서 거둔 수입으로 1년 먹고 살 돈이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2004년 도리도가 화성시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은 더 이상 그곳에 건너가지 못하게 됐다. 풍도 사람들은 “섬을 완전히 빼앗겼다”고 말한다.
■ 여행수첩
풍도 가는 배 제3 왕경호는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하루 한 번 오전 9시30분에 뜬다. 운임은 1만2,500원. 주말이면 좌석이 부족해 미리 인터넷(www.seomticket.co.kr)으로 예약해야 한다.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032)880-7530
섬에는 민박집이 12곳 있다. 식당은 따로 없어 민박집에서 해결해야 한다. 섬 아낙들의 음식 솜씨가 기대 이상이다. 풍도는 꽃 말고도 나물로도 풍성하다. 섬의 특산물인 사생이나물과 냉이나물 등이 기본 반찬으로 나온다. 민박 1박에 3만~4만원, 식사는 끼니당 1인 5,000원이다. 기동이네민박(032-833-1208), 풍도민박(831-7637), 풍어민박(831-3727), 하나민박(831-7634), 풍도랜드(831-0596).
야생화 트레킹 전문 승우여행사가 풍도 상품을 내놓았다. 토요일인 22일과 29일 떠나는 1박2일 일정으로, 오전9시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 모여 출발한다. 왕복 배삯과 민박 1박, 점심과 다음날 아침식사 포함 2인1실 기준 1인 9만3,000원, 3인1실 8만8,000원, 4인1실 8만5,500원. www.swtour.co.kr (02)720-8311
풍도=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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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에서 띄우는 편지/ 반갑지 않은 꽃구경 손님들
풍요로울 풍(豊)자를 쓴다지만 풍도(豊島)에는 경작지라곤 콩이나 채소를 심는 손바닥 만한 밭 몇뙈기 뿐입니다. 고깃배를 가지고 있는 주민도 몇 명 되질 않습니다.
이름만큼 풍요롭지 않은 섬주민들에겐 꽃구경 온 관광객이 반가울 법도 한데, 외지인들을 보는 그들의 시선은 그리 살가워 보이질 않았습니다.
풍도는 꽃구경하기에 그다지 좋게 배려된 곳은 아닙니다. 꽃이 많이 피는 산자락 곳곳에는 흑염소를 키운다고 두른 철조망이 막아 섰고, 잡목이 우거진 산길에선 날카로운 가시나무 덩굴 때문에 욕심을 냈다가는 옷이 뜯겨지거나 손에 가시가 박히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환상적인 꽃밭을 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습니다.
꽃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는데 섬의 노인회에서 ‘꽃구경 오는 이들을 막겠다’, ‘입산금지 시키겠다’는 내용으로 회의를 소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해서 노인회를 찾아가 여쭸더니 김복동(70) 회장은 “야생화를 찍으러 오는 이들 때문에 섬이 남아나질 않는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사진만 찍고 가면 좋을 것을, 몰려든 사람들이 꽃밭을 죄다 밟아놓고, 삼각대로 쿡쿡 땅을 파헤쳐놓거나, 아예 꽃을 파 가는 이들까지 있다고 합니다. 또 이들이 여기저기 저질러놓은 볼일의 흔적 때문에 산에서 나물 뜯는 할머니들이 “더러워 못 살겠다”는 원성도 심하답니다. 여객선이 아닌 낚시배를 타고 몰래 들어오는 이들도 있어 통제나 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고 하네요.
이러다보니 풍도의 꽃은 해마다 줄어들어, 그다지 풍요롭지 않은 섬에 그나마 풍요로움을 주던 야생화들이 남아나지 않을까 두렵다는 게 주민들의 호소였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풍도는 귀한 꽃을 다 잃어버리거나, 외지인의 발길이 끊겨 버리는 기억 속에만 있는 꽃섬이 될 지 모릅니다. 꽃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 인간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꽃을 바라보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이성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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