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도둑질이라니오? 길에 새끼줄이 하나 떨어져 있어 새끼줄을 집어서 끌고 온 죄밖에 없는데요.” 한 농부가 논을 매다가 화장실에 다녀오자 매어 놓은 소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놀라 허겁지겁 없어진 소를 찾아 나섰다가 자기 소를 끌고 가는 한 사내를 발견하고 왜 남의 소를 훔쳐 가느냐고 다그쳤다. 그러자 도둑이 시치미를 떼며 했다는 대답이다.
■ 친이계열만 득세한 한나라 공천
한나라당의 공천파동을 바라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바로 이 옛 이야기이다. 4월 총선 한나라당 공천에서 친이명박 세력이 대폭 공천을 받은 반면 친박근혜 세력이 다수 탈락했다.
이에 대해 친박근혜 진영은 정치적 학살이라며 비분강개하고 있다. 공천에 탈락한 의원들의 탈당사태가 잇따라 ‘친박연대’라는 정치단체가 만들어지고, 박 의원은 어제 기자회견을 통해 무원칙 공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도부의 책임을 거론했다.
그러나 올곧기로 정평이 나 있는 안강민 공천심사위원장이 대통령의 눈치를 봐서 정실 심사를 했겠는가? 집어든 새끼줄에 ‘우연히’ 소가 매달려 있었듯이 심사를 하다 보니 도덕성과 능력, 경쟁력 등 심사기준에 합당한 후보자들이 ‘우연히’ 친이명박 계열이고 친박근혜 계열은 ‘우연히도’ 비리전력 등을 가진 낡은 부적격자들인 것을 어찌 하란 말인가?
문제는 이 우연이 하필 권력을 가진 이 대통령에게 유리한 방향으로의 우연이냐는 것이다. 정말 우연치고는 기이한 우연이다. 결국 공천을 비롯한 세상사가 필연적으로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 즉 ‘우연적 필연’이라고나 할까?
얼마 전 이 지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립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노무현 정권 5년간 노 정권에 비판적인 글을 써왔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명박 정부의 첫 인사를 보고 있노라니 코드인사로 비판을 받아온 노 전 대통령이 오히려 그리워진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이번 공천 파동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노 전 대통령이 그리워진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당을 대통령의 사당(私黨)으로 만들던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과 단절하여 정당정치를 어느 정도 근대화시켰다. 2004년 총선이 대표적인 예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공천에 개입해 자기 사람들을 공천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공천결과가 정말 우연이 아닌 바에는, 이명박 대통령은 한나라당을 MB당으로 사당화함으로써 한국의 정당정치를 3김의 사당정치 시대로 후퇴시키고 있는 것이다.
멀리 노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까지 갈 필요도 없다. 한나라당만 봐도 그러하다. 사실 통합민주당의 경우 새천년민주당에서부터, 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신당, 통합민주당에 이르기까지 분당과 통합을 반복해 왔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1997년 이후 당명을 유지하며 당을 지켜왔다. 한마디로, 정당제도화라는 면에서는 민주당보다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회창, 최병렬, 박근혜, 강재섭 대표체제를 거치면서 당을 이회창당, 최병렬당, 박근혜당, 강재섭당으로 사당화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2004년 총선 당시에도 탄핵정국의 박근혜 비상체제 하에서 친박근혜 인사들로 공천을 채우지는 않았다.
■ 노 전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는데
물론 이 대통령 진영에서는 낡은 수구이미지의 한나라당을 쇄신하기 위해서는 박근혜계열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필요하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번에 공천을 받은 친이명박계의 후보들이 공천에서 떨어진 친박근혜 계열의 후보들보다 도덕성, 개혁성, 능력 등에서 국회의원으로서의 자격이 더 뛰어난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다.
결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과정이며 대통령이나 측근들이 공천과정에 개입한 사당화라면 그 결과가 아무리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의 진보가 아니라 후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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