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은 삼성그룹 창립 70주년이다. 인간사로 치면 '고희(古稀)'를 맞은 것으로 가까운 친지와 덕담을 나누고 건강을 비는 시간. 그러나 기업으로서의 고희는 지난 과거에 대한 점검과 또 다른 미래를 위한 다짐이 필요한 자리다.
하지만 요즘 삼성은 그렇지 못하다. 모든 기념행사를 취소한 채 그룹 전체적으로 그저 조용하다. 새로운 투자로 또 다른 70년을 추구해야 할 삼성으로서는 여러 면에서 아쉽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난 70년 삼성의 역사는 한국 경제의 발달사와 궤를 같이한다. 냉혹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국내 대표기업으로 자리해온 삼성의 역사는 또 한국기업의 '글로벌 경영 개척사' 이다.
70년을 일관되게 삼성을 관통해온 키워드는 '변화'다. 최근들어 지나온 과거에 대한 복합적인 검증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이 역시 또 다른 70년을 위한 '변화'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된다. 그 변화가 한국경제와 기업사에 또 다른 디딤돌로 기능해야 하는 이유다.
◇70년 관통한 변신
현 상황에서 고희 삼성이 추구하는 변화의 핵심은 새로운 경영체질과 미래 성장 동력의 발굴이다. 특히 10년ㆍ20년 뒤에도 일류 기업으로 생존하기 위해선 신 성장 콘텐츠의 발굴이 절대적이다. '앞으로 10년 후 뭘 먹고 살지를 고민하라'는 이건희 회장의 거듭된 지시 역시 이런 배경에서다.
삼성의 미래를 위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신사업 추진팀. 지난해 10월 그룹 전략기획실에 마련된 이 팀의 주된 목표는 미래 성장동력의 발굴 지원과 계열사별로 중복 우려가 있는 신사업 부문의 조율ㆍ조정이다. 그룹 차원의 TFT총괄 팀인 셈이다.
이 조직의 실질적 책임자인 김태한(51) 삼성토탈 기획담당 전무를 20일 만나 삼성의 새로운 70년을 위한 청사진을 들어봤다. 삼성그룹 신 사업팀장의 언론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10년 단위의 '계단식 점프 성장'
올해로 삼성그룹 입사 30년째인 김팀장은 우선 70년 삼성의 역사를'성장을 위한 창조적인 변신'이라고 정의했다. 김 전무는 "삼성그룹은 과거 10년 단위로 대 변신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왔다"며 "하나의 제품연구와 개발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뤄진 지속적인 성장이기 보단'계단식 점프'의 성장사였다"고 강조했다.
국내 시장의 규모가 한정돼 있어 특정 부문에만 집중하면 성장에 한계가 금방 드러나 한 업종에만 집중하기보단 시대상황에 맞춰 자체 경영환경을 변화시키며 도약과 성장을 해왔다는 것이다.
그는 "60~70년대 먹고 입고 사는 것이 어려울 때 설탕과 의복에 집중하며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그룹의 모태로 키웠다"며 "이를 '캐시카우'(수익원)로 삼아 80년대 전자산업에 집중, TV와 라디오를 만들었고, 90년대 이에 대한 핵심 사업인 반도체에 과감히 투자해 오늘날 삼성전자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같은 '계단식 점프성장'은 삼성그룹의 미래를 선점하고 시대상황을 앞서나가는 경영의'타이밍 예술'이라는 것이 그의 논지다.
그는 "2000년대 들어 반도체 등 전자시장이 포화상태로 접어들면서 2003,4년 그룹 매출규모가 180조원에서 정체현상을 보이자 반도체와 LCD, 정보기술(IT) 부문에 치중된 사업구조를 다변화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며 "결국 이 같은 상황에서 새로운 사업의 체계적 발굴과 그룹의 역량을 집중하기 위한 공감대가 조성됐고 지난 2년간 내부적인 연구와 정보수집 등을 통해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기 위해 지난해 신사업 팀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에너지와 환경, 건강, 바이오사업에 주목
그는 10년 후 삼성의 이미지가 과연 어떤 식으로 바뀔 지에 대한 질문에 "PDP TV와 핸드폰, 가전 등으로 대표되는 삼성전자의 디지털 이미지도 시류에 따라 진화하겠지만 에너지와 환경, 헬스캐어, 바이오 기업으로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와 닿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고유가와 함께 주목 받고 있는 태양광 등 신 재생에너지와 지구온난화 등을 고려한 환경 사업이 삼성의 미래 성장동력의 중요한 축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또 웰빙(Well being)문화를 선도하기 위한 건강과 바이오 산업 역시 삼성이 주목하고 있는 분야라고 밝혔다.
김 전무는 태양광에너지 사업과 관련"삼성전자와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에버랜드, 삼성물산 등 주요 계열사들은 이미 '태양광 밸류체인(태양광 에너지사업을 위한 기본 소재개발서부터 설비, 발전사업에 이르는 사업구조)'에 대한 각 분야별 개별 연구와 기술도입, 사업제휴 등을 모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결국 계열사별 사업추진 현황을 교통정리하고 조율하는 기능은 지금 '올 스톱'된 상태다. "지난해 10월 공식적으로 출범한 신 사업팀의 운영과 관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투자계획은 물론 유망 해외기업체와의 기술제휴, 전략적 협약, 기업인수합병(M&A) 추진 계획이 큰 차질을 빚고 있으며 경영예술의 핵심인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간과의 경쟁, 신 수종사업
김 전무는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글로벌 시장의 경쟁은 더 치열한 상황"이라며 "신 수종사업은 시간과의 경쟁이다. 효율적인 자본활용을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를 놓치고 있다는 것은 그룹 뿐 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치명적이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해외 기술도입을 위한 제휴 선으로부터 사업계획을 물어오는 전화를 받느라 여념이 없다. "일단 상황이 마무리될 때 까지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거듭하고 있을 뿐 다른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 그의 아쉬움이다. 그는 "당초 계획대로 라면 올해 10~20개 아이템 중에서 3,4개 사업에 착수해야 하는데 올 상반기는 이미 다 지나간 상태"라며 "지금과 같은 경영공백이 계속된다면 지금까지의 계획을 접고 새로운 그림을 짜야 할 판"이라고 덧붙였다.
"급변하는 국제 경쟁현장에서 일정기간의 경영공백은 그만큼 후퇴를 의미한다"며 '삼성의 또 다른 70년 사'준비팀장으로서의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 통계와 산업사로 본 삼성 70년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은 1938년 3월22일 대구 중구 인교동에 지하 1층, 지상 4층 목조건물을 세워 '삼성상회'라는 명패를 달았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 삼성은 매출 150조원을 넘는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삼성의 70주년을 돌아보는 것은 국내 기업사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통계로 보면 삼성은 창업 30주년이던 1968년 연간 220억원 규모의 매출에서 50주년이던 1988년에는 20조1,000억원으로 100배 성장했고 2006년말 현재 152조원으로 성장했다. 수출 역시 1968년 28억원이던 것이 1988년 9조원으로 늘어 2006년에는 63조원으로 불었다. 고용인력도 같은 기간 7,000명 → 16만명 → 25만명으로 증가했다. 시가총액은 2006년말 기준 140조원을 넘어섰고, 국제적인 기관에서 보는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지난해 말 현재 169억 달러를 기록했다.
삼성의 역사는 실제 한국 기업사와 맥을 같이 한다. 경공업 → 중화학공업 →전자업 → 첨단 IT업 등 우리나라 산업성장의 흐름은 삼성의 발달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이 일제강점기 농수산물 무역에서 출발해 해방후 제당ㆍ모직사업에 집중하고 이후 전자, 첨단 IT업을 확장해 나간 것은 국민들의 생활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삼성의 글로벌 경영은 국내 최초의 해외거점으로 삼성물산 도쿄(東京)지점을 연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반도체 분야 D램 세계 1위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이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나 2000년 시가총액과 2005년 브랜드가치 면에서 일본의 대표기업 소니를 추월한 것 역시 글로벌 경영의 개가로 평가된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취임 이듬해인 1988년 시작된 '제2창업',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신 경영 등으로 내달린 지난 20년간의 삼성 변화는 글로벌 기업을 위한 변신을 가속화했다.
삼성은 지금 창립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삼성은 지난 60주년 때에도 외환위기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지금의 위기는 폭과 깊이면에서 당시와는 비교하기 어렵다. 국내외 관계자들은 삼성에 대한 입체적인 검증과 내밀한 조사가 '글로벌 삼성'에서 '사랑받는 삼성'으로 거듭나는 출발점이어야 한다는데 한목소리들이다.
장학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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