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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박근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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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 칼럼] 박근혜 생각

입력
2008.03.1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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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정치적 힘이 가장 큰 이는 대통령이다. 그러니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정치권력자는 이명박씨다. 좀 긴 시간대의 간접적 힘까지 치면 삼성의 이건희씨가 더 큰 힘을 지녔다 볼 수도 있겠으나, 좁은 의미의 정치적 힘만 따지기로 하자.

그럼 이명박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정치적 힘을 지닌 이는 누구일까? 제1야당의 법적 대표 모씨? 국무총리 모씨? 아니다. 지금 이명박씨 다음의 정치적 힘을 지닌 이는 박근혜씨다. 지난해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이후의 냉혹한 파워게임 끝에 요즘 박근혜씨가 정치적 궁지에 몰려 있다는 사실도 이런 판단을 고치지 못한다.

■ 아버지의 이름, 자신의 이름

지금 제1야당의 법적 대표는 옛 야권에서 건너간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 4월 총선 결과에 따라 그의 처지가 크게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야권의 명실상부한 리더라 할 수 없다. 박근혜씨를 뺀 여당의 이런저런 '실세'들이나 국무총리를 비롯한 행정부 고위관료들은 제 정치적 힘을 거의 고스란히 대통령의 한시적 신임에 기대고 있다.

박근혜씨는 다르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지지집단을 거느린 정치인이다. 박근혜 지지집단의 충성도와 응집력은 옛 노사모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상징적 뒷배라는 자산을 지닌 채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으므로, 그의 가파른 정치적 성장을 노무현씨의 그것에 나란히 댈 수는 없다.

그러나 박근혜씨가 오로지 아버지의 이름만으로 정치를 해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지자들 역시, 단지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2004년 노무현 탄핵소추의 반작용으로 궤멸의 위기를 맞은 한나라당을 되살려냈을 때, 박근혜씨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 어려운 일을 해내지는 않았다. 그는 상당 부분 자신의 지도력으로 한나라당을 이끌었고, 그의 품안에서 체력을 키운 한나라당은 결국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박근혜씨의 지금 처지는 현실정치의(나아가서 세상살이의) 얄궂음을 새삼 곱씹게 만든다. 한나라당이 2004년 총선에서 기사회생하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 완승한 데는 그 시기의 당대표 박근혜씨의 지도력이 결정적이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누가 나가든 제 당의 승리가 거의 확정적이었던 17대 대선에, 박근혜씨 대신 윤리적으로 미심쩍은 지방행정가를 내보냈다.

후보 경선 때 박근혜씨를 반대하고 대선 이후 박근혜 그룹의 당내 숙청을 주도한 이들 가운데 박근혜씨 덕을 보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박근혜씨가 느낄 배신감을 얼추 짐작하겠다.

18대 총선을 치르는 4월9일은 박근혜씨의 정치역정에서 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나는 박근혜씨가 이날 또 하나의 결단을 내려주었으면 한다.

4월9일은 33년 전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 법학자회의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한 날이다. 이 날, 소위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여덟 사람이 확정판결 10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몇 해 전 사법부가 재심 끝에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자, 박근혜씨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정치공세라 일축했다.

그것이 박근혜씨의 진심은 아니었으리라 믿고 싶다. 그는 그저 그 사건을 잊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박근혜씨는 그때, 마땅히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죄했어야 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 사죄 한마디 하면 될 것을

이를 두고 연좌제 운운하는 것은 망발이다. 누구도 인혁당 사건을 두고 박근혜씨를 비판하지 않는다. 사법살인을 저지른 것은 박정희이지 박근혜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매히 간첩으로 몰려 참혹한 고문 끝에 살해된 이들의 유족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는 것은 최소한의 윤리다. 아버지의 두드러진 정치적 과오를 사죄하는 것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 다부진 정치인이 그의 아버지를 미워하는 이들에게까지 인정 받는 지도자가 됐으면 한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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