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원래 우파의 나라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10년간 잠시 착시현상이 있었을 뿐 한국은 우파가 지배하는 나라였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를 좌파라고 단정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지만 굳이 구분하는 게 요즘의 세태인지라, 그것을 전제하고 본다면 이 나라는 정부수립 후 60년 중 50년은 우파의 세상이었다.
■ 총선 앞두고 달라지는 민심
지난해 12월 19일 대선이 우파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을 때 승자도, 패자도, 국민들도 우파의 시대가 길고 길게 기록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잠시 잊어 버렸던 '한국의 다수세력은 영남에 기반을 둔 우파'라는 사실을 재확인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DJ가 당선됐던 1997년 대선이 '우파의 다수론'을 가장 잘 입증해 주었다. 당시 대선 구도는 DJ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외환위기가 왔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터졌으며, DJP연합이 이루어졌고, 이인제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 무려 492만 표(18.9%)를 얻었다. 다른 나라라면 이 중 한 가지만으로도 야당이 낙승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겨우 39만 557표, 1.5% 차이가 났을 뿐이다.
2002년 대선 역시 우파의 구도가 깨진 결과였다. 이회창 후보는 다시 불거진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에다 호화빌라 파문, 며느리의 원정 출산 문제까지 겹쳐 깊은 내상을 입었다. 또한 노무현 후보가 영남 출신으로 부산과 경남에서 DJ의 15% 득표율을 훨씬 넘는 29%, 26%를 얻어 이 후보의 표를 잠식했고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우파의 입장에서 보면 2002년의 구도는 97년보다 불리하지 않았다. 적어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나 이회창 후보의 도덕성 논란이 외환위기나 이인제 후보의 탈당, DJP 연합보다 파괴력이 더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DJ에게 진 것보다 더 많은 57만 표, 2.3% 차이가 났다.
우파의 나라에서 우파가 졌을 때는 뭔가 심각하게 잘못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네거티브에 졌다느니, 홍보에서 밀렸다느니, 노무현의 드라마틱한 인생에 당했다느니 온갖 해석이 있었지만 단 한 가지만 꼽으라면 우파의 오만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우파의 오만이라…희미해진 기억을 반추해 보기 위해 DJ정권 말기로 돌아가보자. 당시 DJ는 아들들의 비리로 레임덕에 들어가 있었다. 한나라당은 빈번하게 총리나 각료들을 탄핵, 낙마시켰고 새 총리나 각료 후보자들에게 엄청나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적용, 임명장도 받지 못하고 물러나게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죽하면 "실제 대통령은 이회창"이라는 말까지 나돌았을까. 한나라당도 마치 집권한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그런 오만은 국민의 등을 돌리게 했고 대선 패배로 이어졌다.
그 뼈아픈 경험은 반성으로 이어졌고 지난 대선에서 자제와 신중함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정상에 있으면 달라지는 법인지, 다시 오만의 추억이 살아나고 있다.
국민들은 무심해 보이지만, 그리고 과거를 다 잊은 듯 하지만 기억할 일은 무섭게 기억한다. 온갖 문제투성이의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에 대한 임명을 강행했을 때 과거 한나라당이 각료 검증에서 들이대던 엄격한 잣대를 기억해내고, 영남 편중의 인사가 이루어질 때 과거 한나라당이 지역편중 인사를 신랄하게 비난했던 일을 기억해낸다.
안상수 원내대표나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코드가 다른 기관장들은 물러나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 한나라당이 그토록 낙하산 인사, 코드 인사를 경멸했던 장면을 국민들은 떠올린다.
■ 국민의 무서움 잊지 말아야
대선 후 불과 3개월도 지나지 않아 우파의 압도적 우위구도는 사라져가고 있다. 국민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우파가 서서히 밀리는 것을 놓고 인수위가 어땠느니, 조각이 어땠느니, 정책이 어땠느니 등등…그 원인을 복잡하게 분석할 필요가 없다. 그 중심을 관통하는 것은 단 하나 오만이다. 뭔가 잘 안 풀리면 우파의 오만이 초래했던 아픔을 추억해 보는 것은 어떨지.
이영성 부국장 겸 정치부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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