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이쯤 되면 확실한 시그널이 있어야 했다. 열흘 남짓 동안 원ㆍ달러 환율이 100원 가까이 폭등하는 동안 당국은 시종일관 뒷짐만 지고 있다. 너무 태평해 보인다. 17일 환율이 하루에 30원 이상 급등하자 뒤늦게 한국은행이 한 마디 구두 개입을 한 것이 전부였다.
시장은 이미 혼란을 넘어 극심한 패닉 상태다. ‘노 코멘트’도 나름의 대응 전략이라지만, 당국의 무대응이 시장 공포감을 키우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일각에서는 “당국의 직무 유기가 아니냐” “6% 성장을 위해 모든 걸 다 버린 게 아니냐”는 강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 과연 대응을 안 하는 것일까, 못 하는 것일까.
물론 지금 환율 급등의 본질은 외생적 요인에 있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기 보다는, 베어스턴스 유동성 위기 등 잇단 미국의 대형 악재가 ‘원화 약세’에 기름을 붓는 양상이다.
외환 당국이 섣불리 나서기 힘든 이유다. 한 외환시장 관계자는 “지금 환율 급등은 80~90% 미국 발 요인에서 비롯되고 있다”며 “미국의 신용 위기가 진정되지 않는 한 섣부른 정부 개입이 자칫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달러 매도 개입은 매수 개입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게 정설이다. 한 시중은행 외환 딜러는 “환율을 끌어 올리기 위해 정부가 달러를 사들이는 경우 ‘수익률 리스크’만 안으면 된다”며 “하지만, 환율을 내리기 위해 정부가 달러를 팔아 치우는 경우 나중에 되돌릴 수 없는 달러 부족 상태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 당국이 대응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과도한 시장 개입도 위험하지만, 지금 같은 과속 상황에서 무대응은 더 위험할 수 있다. 최소한 시장 공포감을 해소하고 신뢰를 심어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시장에서는 정부가 지금의 환율 상승을 “즐기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대응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 최중경 1차관이 경상수지 적자 해소, 성장률 목표 달성을 위해 지금의 환율 상승을 용인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외환시장 한 관계자는 “강만수 장관이 성장률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다 포기하려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까지 했다.
한국은행이 이날 오후 뒤늦게 “환율 상승 속도가 너무 빠른 감이 있다”며 구두 개입에 나선 반면, 환율 정책의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는 끝내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 이런 관측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더구나 강 장관은 금융시장이 요동을 치는 와중에 부처 대통령 업무보고 배석 차 연일 지방을 전전하고 있다.
강 장관은 취임 후 “정부는 환율 정책과 관련해 거짓말할 권리가 있다”고 누차 밝혀 왔다. 거짓말이든 뭐든, 한시라도 빨리 권리 행사에 나서지 않으면 수습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신산업연구실장은 “환율 상승 속도가 지금처럼 가파르면 추종 세력이 불을 지피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된다”며 “정부가 대응책 마련 등의 강력한 코멘트를 통해서 기대심리를 낮춰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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