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의 세계에서 수작과 졸작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오늘날 예술의 가치는 결국 보는 이의 눈에 달린 것 아니냐’는 질문도 잊지 않는다. 사교적인 자리에서라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작품의 가치를 측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의 기준을 정답으로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가치가 보는 이의 눈에 달렸다는 주장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재차 반문이 날아온다. ‘왜 당신은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만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나?’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는 걸작만 꼽아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설명하기도 바쁜 직업이 평론가인 터라, 그런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미술사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을 지라도, 아름답고 소중한 작품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굉장히 드문 예지만, 극소수의 재능 있는 아마추어들은 수작을 남기고, 또 3류 예술가가 단 몇 점의 경우에서만큼은 괄목할 만한 결실을 맺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림 그리는 가수’인 백현진이 그렇다.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가로 알려진 그는, 현재 아라리오 갤러리의 소속 작가로 활동 중이지만, 그를 프로페셔널 화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중퇴하기는 했으나, 그의 작업량은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현대미술의 지형에서 유효한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의 그림 대다수는 어디까지나 ‘그림 그리는 가수’의 작품으로 볼 때, 귀엽고 사랑스럽다(마치 조영남의 화투그림처럼). 하지만, 거두절미하고, 그의 연작 ‘순대곱창’만큼은 명백한 걸작이다.
1997년 어어부 프로젝트의 1집 <손익분기점> 으로 데뷔한 이래, 백현진은 저자, 마부 등의 별명으로도 활동해왔는데, 널리 알려진 그룹답지 않게 경제적 이득은 미미해서 빈궁한 삶이 이어졌다. 한동안 그의 경제적 자립을 지탱해 준 것은 2000년도에 시작한 일러스트레이터 노릇이었다. 하지만 디자인 관련 일에 회의를 느낀 그는, 2004년 어느 날 일체의 외부 기고를 그만두고 방구석에 처박혔다. 손익분기점>
뭔가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겠는데, 마땅히 잘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백수의 꼴이었다. 그때,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친구가 선물해준 수첩이었다. 샤프펜슬을 집어든 무일푼의 남자는 무작정 무언가 마음속에 떠오르는 형상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꼬불꼬불 이어지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정체불명의 존재는, 종종 사람의 형상이 되기도 하고, 글자가 되기도 하고, 자연의 풍광을 모사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순대곱창’ 연작은 2005년 한 권의 단출한 기록집으로 완성됐다. 90점의 작품을 담은 <염기 섞인 붉은 책> 이 바로 그것. 돌이켜보면, 신묘하고 괴기스러운 이 형체들은 작가의 가장 고통스런 순간이 꽃피운 주술적 발화였던 셈이다. 염기>
미술평론가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