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부터 시작된 티베트(시짱ㆍ西藏 자치구) 시위 사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규모와 강도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89년 이후 최악의 유혈 사태로 기록될 이번 사태는 10일 수 천 명의 승려와 티베트 주민이 거리로 나와 1주일 가까이 동시 다발적인 시위를 벌여가며 진행됐다. 특히 중국 관공서와 호텔, 경찰차량 등에 불을 지르는 등 시위 강도는 중국 당국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14일에만 시짱 자치구의 수도 라싸(拉薩) 시내 160곳에서 방화가 발생했다는 통계는 이번 소요 사태의 상황을 단적으로 웅변한다.
라싸를 관광하다 쓰촨(四川)성으로 빠져나온 덴마크인 벤테 월(58ㆍ여)씨는 15일 “오늘 라싸는 완전히 폐쇄됐다. 중국군 천지”라며 “마치 유령도시 같다”고 전했다. 그는 유혈 시위가 발생했던 14일 오후 티베트 포탈라궁을 거닐던 도중 “엄청한 화재를 목격했으며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달아나고 있었다”고 전했다.
서방언론들은 사태의 진원지인 라싸에서 멀리 떨어진 간쑤(甘肅)성 샤허(夏河)의 티베트인 밀집지역에서 4,000여명의 티베트인들이 14일부터 이틀간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시위대는 라싸 시위에서처럼 “망명 지도자 달라이라마는 티베트로 돌아와야 한다” “티베트인들은 인권을 요구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진압경찰과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티베트인들이 다쳐 병원으로 이송됐다. 주민들은 현지 상황을 “혼란 그 자체”라고 묘사했다.
이번 사태에서 티베트 주민들은 중국 당국에 대한 증오심을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했다. 한족 경영 호텔, 상점 등에 불을 질러 호텔 종업원 2명과 상점 주인 2명 등이 불에 타 숨졌고 한족들을 무차별 구타했다는 중국 관영 언론의 보도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소요 사태의 희생자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중국 정부는 10명이 사망했다고 밝혔고, 인도 다람살라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80명이 숨지고 71명이 부상했다고 밝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외신들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최대 100명까지 희생됐을 것으로 전하지만 신빙성이 높지는 않아 보인다. 시위 방화자를 향한 진압 경찰의 발포가 있었지만 군대가 적극적으로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중국 당국에 대한 비난여론도 잇따랐다.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티베트 지역 여행 주의 경보를 발령한 뒤 “라싸 내부와 근처에 경찰과 군병력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에 염려가 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또 중국의 무력대응 자제와 체포된 승려 및 일반인의 석방을 요청했다.
지난해 중국의 반대속에서 달라이 라마를 면담했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중국 정부와 달라이 라마 간의 평화적인 직접 대화를 촉구했다. 대만 외교부는 “중국군의 진압으로 촉발된 폭력적인 소요사태에 우려를 표명하며, 인권을 침해한 중국의 무자비한 행동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비난했다.
■ 후주석·티베트 악연의 고리
공교롭게도 15일 국가주석으로 재선출되며 집권 2기를 시작하는 날 티베트 유혈 시위 사태를 맞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티베트(시짱ㆍ西藏)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20년 전인 1988년 구이저우(貴州)성 서기였던 후 주석은 심장병을 심하게 앓는 우화(伍精華) 티베트 서기의 후임으로 당시 정정이 극도로 뒤숭숭했던 티베트에 부임했다. 부임 1주일전 라마 승려 한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하는 소요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후 주석은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로부터 분열주의자의 활동을 막고 경제건설에 힘쓰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1989년 2월 판첸 라마가 사망한 직후 티베트 정정은 더욱 불안해졌다. 3월 초까지 4차례 크고 작은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성도인 라싸(拉薩)에서는 물론 나취(那曲) 창뚜(昌都) 등 다른 티베트 도시로까지 소요사태가 확산됐다.
그해 3월 5일 1만명의 승려들과 티베트 주민들이 라싸 거리를 점거하고 경찰차 등을 불태우자 후 주석에게 진압명령이 떨어졌다. 진압군과 경찰의 총성이 울렸고 3월 7일 진압을 완료됐다.
당시 티베트일보는 철모를 쓴 후 서기의 모습과 계엄부대 병력이 라싸 거리에 서 있는 사진을 실었다. 후 주석이 철모를 쓰고 유혈진압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덩샤오핑(鄧小平) 등 당시 지도부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이런 인상이 대권 후계자로 이어지는데 무시 못할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1990년 말 고산병을 얻어 베이징에서 요양하던 후 주석은 제4세대 지도자로 발탁되면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의 후계자로 낙점된다.
티베트 서기 당시 무력진압을 통해 최고 지도자로 오르는 발판을 마련한 후 주석은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또 한번 티베트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 中 '올림픽 공든탑 무너질라' 속앓이
10일부터 시작된 티베트(시짱ㆍ西藏 자치구) 사태를 보는 중국 정부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하다. 국가 역량에 총동원해 준비해온 8월 베이징(北京) 올림픽에는 최악의 악재이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의 이미지는 이번 사태로 크게 금이 갔다. 중국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온 국제 여론은 올림픽을 대중 인권 공세를 강화하는 호재로 활용할 것이 분명하다.
할리우드 스타인 리처드 기어는 "중국이 소요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않을 경우 베이징 올림픽 참가를 거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사태는 지난 달 고조됐던 수단 다르푸르 인종 학살 사태에 대해 중국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국제적인 비난 여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발성을 지니고 있다. 중국 내에서 발생한데다 사태가 중국 당국의 무력진압으로 유혈사태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소요 발생 후 뉴욕 유엔본부, 네팔,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반중 시위가 우후죽순처럼 벌어진 것은 이를 반증한다.
이번 사태가 올림픽 개최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올림픽 개최와 이번 사태는 별개"라고 선을 긋고 미국 정부도 올림픽 참가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화민족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기획된 올림픽이 숱한 상처 속에서 진행되는 지극히 방어적인 행사로 전락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이번 사태는 중국 내 분리 독립주의자들의 활동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중국 정부에 각인시켰다. 수 천 명의 티베트 승려와 일반인들이 일제히 봉기하고, 티베트가 아닌 간쑤(甘肅)성으로 확산되는 등 소요 규모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또 사태는 인도 다람살라 티베트 망명정부가 1959년 봉기 49주년을 맞아 시위를 진행한 것에 호응해 전개됐다는 점에서 티베트 지하조직의 역량이 만만치 않음을 입증했다.
중국 정부가 이번 사태를 망명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사주로 규정하는 것은 봉기 참가자들의 '자발성'을 애써 무시하고 싶기 때문이다. 티베트와 함께 분리주의 움직임이 활발한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등에 대한 중국 정부의 통제도 강화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를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요구를 철저히 무시할 것으로 보인다. 또 1959년, 89년 봉기 때처럼 엄청난 공권력을 동원할 것도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불씨는 완전히 제거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이징=이영섭 특파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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