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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엇박자 속도감

입력
2008.03.1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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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현대그룹에 계신 분들을 만나면 솔깃한 말을 많이 듣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이에서 근무했던 분들의 과거 기억들 때문이다.

그 분들은 대통령이 제일 싫어하는 유형을 대략 세 부류로 기억한다. (표현은 좀 그렇지만) 똥폼 잡는 사람과 뇌물 받는 사람, 그리고 게으른 사람이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측근이나 비리에 연루된 임직원에 대해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인사조치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게으른 사람을 그저 봐 넘기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분들은 “앞뒤 안 보고 몰아쳐 따라가려면 정신이 없었다”면서 “지금 청와대 참모나 각료들은 아직 산중턱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혼자 정상에 올라 깃발을 흔들 것”이라고 말했다.

■ 게으른 사람 꼴 못 보는 대통령

사실 취임 전 인수위원회가 부처 차관 국장급에서나 발표할 사안들을 연달아 내놓을 때부터 급한 조짐은 있었다. 영어로 수업한다고 할 때 영어에 쫓기듯 매달린다 싶더니 2013년까지 영어전용교사 2만 3,000 명을 신규 채용하겠다면서 끝자리 숫자까지 들이댈 때는 주체할 수 없는 조급함을 알아봤다.

급하게 몰아치는 대통령의 모습은 요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부터 각 부처를 도는 모습에서 여지없이 확인된다. 보고를 준비하는 실무자들 기준으로는 일찍 일어나는 ‘얼리버드’가 아니라 아예 잠을 자지 않아야 쫓아갈 정도다.

첫 국가경쟁력 강화특위 회의는 변화에 대한 대통령의 속도감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기업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 금년 안에 해결하려고 작심하고 있다”는 말은 곧 뭔가 끝장을 보겠다는 초고속 의지 표현이다.

대통령과 참모조직의 속도감을 파악하기 위해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를 떠올려 보자. 그는 <부(富)의 미래> 에서 9대 자동차의 속도를 측정했다. 변화에 가장 빠르게 대응하는 시속 100마일 자동차는 기업이나 사업체다.

90마일로 NGO(비정부기구) 중심의 시민단체가 달리고 있고 60마일의 차는 가족이다. 한참 뒤처지는 30마일 쯤에 노동조합이 있고, 그 뒤에 정부관료 등 규제기관이 25마일의 속도로 따른다. 이보다도 못한 느림보 조직으로는 교육(10마일) 국제기구(5마일) 정치권(3마일) 법(1마일)이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대통령은 1965년 이후 사회생활의 절반 이상(27년)을 시속 100마일인 기업, 현대에서 보냈다. 대통령에게 각인된 속도감의 DNA는 영락없는 시속 100마일이다. 이런 속도감으로는 나라 전체가 그저 느려 터졌을 터이고 그러하니 인수 준비하면서부터 집권 마지막 해의 원어민교사 숫자까지 생각하고 새벽부터 몰아치지 않으면 도대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 “지금 경제팀 1년 못 간다”는 말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청와대 비서진이나 각료들, 특히 경제팀의 속도감은 결코 대통령을 따라잡기 힘든 구성이다. 10마일 분위기에 익숙한 교수 출신이 주축이고 각료들의 속도라고 해봐야 대통령 속도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물론 같은 공무원이라도 경제부처의 경우 법조나 교육계보다는 빠르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인수위 시절부터 내놓는 경제참모들의 발언이나 출범 후 대책들을 보면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듯하다. 경제장관 회의의 분위기나 한국은행에 대한 재경부의 시각, 환율 물가대책 등은 물론 심지어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기본 발상까지 10여년 전 기자의 수첩에 받아 적은 그대로다.

지난 10년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아무리 변한 게 없어도 우리 사회는 분명 앞으로 나아갔다.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 과거식을 고집하면 아픈 과거를 초래한 그때 그 사람들 때문에 경제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혼자 산꼭대기에 올라 빨리 오라고 깃발을 흔드는 대통령은 분명 문제다. 그러나 후배 말을 듣지 않고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제팀은 더 큰 문제다. “이대로라면 현 경제팀, 1년도 못 간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종재 국차장 겸 경제부장 jchong77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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