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만 채의 전각이 줄지어 섰는데 벽에는 그림을 그려 넣거나 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여러 층짜리 집이 위로 치솟아 있고, 높은 사닥다리가 아래로 드리워져 있기도 했습니다. 처마에는 비단깃발을 꽂고 문에는 그림이 그려진 간판을 내건 것도 보였는데 각각 상품의 명칭을 써 놓았습니다…천하의 큰 도회지로 정말 번화했습니다.” 조선 정조 때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정원시(鄭元始)가 고한 연경(燕京) 번화가 유리창(琉璃廠)의 모습이다. ‘고층건물’에 압도된 그는 용케도 깃발과 간판에도 눈길을 주었다.
■이 깃발과 간판이 바로 중국 전래의 두 가지 간판 형태인 왕쯔(望子)와 자오파이(招牌)다. 왕쯔는 상품 모양이나 업종을 나타내는 물건이나 술 ‘주(酒)’ 자 등을 써넣은 깃발이고, 자오파이는 글자를 써 넣은 널빤지로 오늘날의 간판에 더 가깝다. 이 두 가지 형태는 한국의 간판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근대 이후에는 자오파이 형태가 주종을 이루었지만, 열쇠 모양의 간판 등 왕쯔의 전통도 가늘게 이어지고 있다. 일본도 비슷하지만 점포 입구에 늘어뜨린 천 위에 상표나 상호, 상품을 표시한 ‘노렌(暖簾)’이 지금도 강한 전통으로 살아남은 점이 눈에 띈다.
■간판은 건축물과 함께 도시의 인상을 결정짓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서울 구경을 했다. 밤 늦게 서울역에 도착해 회현동 은행나무 근처의 여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눈이 휘둥그래졌다. 가물거리는 호롱불이 고작이어서 제삿날 촛불만 켜도 방안이 환했던 촌놈에게 네온사인으로 물든 서울의 밤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떠보니 휘황하던 도시의 모습은 간 데 없고, 흉물스러운 간판을 매단 회색 건물들이 을씨년스러웠다. 서울의 밤과 낮이 보여준 극명한 대조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구미 선진국 사람들이 한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문화 차이를 느끼는 것이 여자 옷차림과 화장, 간판이라고 한다. 건물을 집어삼킬 듯 울긋불긋, 얼룩덜룩하게 뒤덮은 간판은 누가 보더라도 유난스럽다. 늦었지만 서울시가 본격적 간판 규제에 나선다는 소식은 그래서 반갑다. 유럽 주요도시가 현재의 품격을 갖추게 된 것도 18세기에 이미 시작된 강력한 간판 규제에 힘입은 바 컸다. 무조건적 규제완화가 시대정신이라고 착각, 간판 규제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압구정동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간단한 간판정비만으로 거리가 얼마나 차분해졌는지를 금세 확인할 수 있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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