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양양히 따사로워도 종로 3가를 걷다 보면 우울해진다. 비 오는 날 지하철 종로 3가 역으로 내려가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언제부턴가 탑골공원 부근은 노인들의 영토가 되었다. 복색은 달라도 함께 나눠가진 세월의 흔적 때문인가, 모두 닮아 보인다. 퀭한 시선 사이를 걸으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를 생각한다. 최근 미국 아카데미상의 4개 부문을 석권하고, 영국 아카데미상 감독상 등 세계 유수의 상을 휩쓴 영화이다. 노인을>
영화를 보지 않고 제목만 아는 사람들의 짐작과 다르게 이 영화는 주인공이 노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총격전과 피비린내가 낭자한 폭력적인 작품이다. 원제인 ‘No Country for Old Men’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로 번역한 건 잘한 일이지만, 의미로 보자면 ‘노인이 살 곳이 아니다,’ 혹은 ‘이제 이 세상은 노인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다’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노인을>
영화를 보는 눈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를 읽는 눈처럼 다양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릴러로 보는 사람, 영화 속 인물들이 우리 삶의 요소를 상징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측 불가능한 삶의 은유로 보는 필자 같은 사람도 있다. 한때 예측이 가능했던 우리의 삶이 언제부턴가 영화 속 동전 던지기처럼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좀더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상대적 목표가 세상을 지배하면서부터다. 율리시즈>
더 많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위한 달리기 속에서 노인들의 영토는 자꾸 줄어들고 있다. 지난 달 통계청이 발표한 걸 보면 전국 가구 중 상위 20%의 평균연령은 점차 젊어지는 반면, 하위 20%의 가구주 연령은 2004년 51.33세에서 작년엔 54.68세로 높아졌다고 한다. 몸도, 마음도 주머니도 가난한 노인들에게 늘어나는 건 회고를 위한 시간뿐이다. 명작이 으레 그렇듯, 영화는 악화된 세상을 보여줄 뿐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으니 깨우침은 보는 사람의 몫이다.
정부는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해 주던 오래된 가치들을 현재에 되살릴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한다. 젊은 시절 가족과 나라를 위해 일한 노인들이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게 사회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여든 넘은 어르신들에게 건강진단 받으라고 하는 식의 전시성 선심 말고 정말 필요한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노인은 세상의 빠른 박자에 기죽어 젊은이들을 흉내내거나 쓸데없이 큰소리치지 말고 조용하고 당당한 조연 노릇을 해야 한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젊은이가 문득 정신 들어 불안할 때 그를 붙들어 줄 수 있으려면 남은 시간이라고 아무렇게나 보내선 안 된다.
젊은이는 노인의 주름에서 제 미래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초라해 보이는 3월의 나무들을 보며 지난 여름과 가을, 그 잎들과 열매를 상기해야 한다. 정부와 노인과 젊은이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되면 종로 3가를 걷는 일이 즐거워질지 모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김흥숙 시인ㆍ번역 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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