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란 무엇입니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마른 똥막대기다.”
운문(雲門)선사의 대답이다.
부처는 지고한 깨달음을 이룬 분인데 운문선사는 왜 똥막대기라고 했을까. 한국 선불교의 대표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에서는 수행자에게 이렇게 화두를 던져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온통 의심으로 가득 차있던 마음이 어느 순간 툭 터질 때 하나의 경지를 터득하게 된다.
선(禪)의 원류는 중국 선종을 개창한 달마대사와 그 뒤를 이은 혜가 혜능 마조 임제 등 수많은 선사들이었다. 간화선(看話禪)은 중국의 선사들에 의해 10~12세기에 형성됐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온(527년) 후 700여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ㆍ1089~1163)선사와 고봉원묘(高峰原妙ㆍ1238~1295)선사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의 발자취를 찾아 조계종 총무원과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 주최로 전(前) 각화사(경북 봉화) 태백선원장 고우 스님과 부산 범어사 승가대학장 무비 스님을 비롯, 여러 스님과 신자 100여명이 10일부터 3박4일 동안 중국의 선종 사찰들을 돌아보는 순례길에 올랐다.
양쯔강 남쪽에 있는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시. 요즘 경제 성장이 빠르기로 손꼽히는 이곳은 고대 중국에서 불교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다. 순례단이 처음으로 들른 아육왕사(阿育王寺)는 선종 5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가 있는 고찰이다.
북송(北宋)에서 남송(南宋)으로 교체되던 혼란기에 살았던 대혜선사는 금(金)과 싸울 것이냐 화해할 것이냐를 둘러싼 당쟁에 휘말려 15년간 귀양살이를 한 후 왕의 지시로 이 절의 주지로 부임했다. 그는 이곳에서 간화선을 널리 가르쳤다.
여느 중국 절처럼 포대화상을 모신 천왕전 뒤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고 그 뒤에 사리전이 서 있다. 그러나 부처의 사리는 사리전이 아니라 그 옆 건물 장경루 법당에 모셔져 있다. 한국에서 순례단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주지 스님이 직접 사리를 꺼내와 순례단 모두 친견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유객지보(遊客止步ㆍ나그네는 발걸음을 멈추시오)’. 낯설지 않은 팻말이 발을 멈추게 한다. ‘조고화두(照顧話頭ㆍ화두를 비추어보라)’ ‘염불시수(念佛是誰ㆍ염불하는 자가 누구냐)’, 기둥에 걸린 주련이 선방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선방에서 웬 염불 소리인가. 절을 둘러보니 개산당(開山堂)에 역대 주지 스님들의 얼굴을 새긴 석판들 가운데 대혜선사의 초상이 있다. 남아있는 대혜선사의 유일한 흔적이다.
한국에선 간화선을 산 속의 스님들이나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혜선사는 당시 조정에서 벼슬을 하던 사대부들에게 간화선을 가르쳤다. 한국 스님들이 간화선 수행의 교재로 쓰고 있는 대혜선사의 <서장(書狀)> 은 그가 40명의 사대부, 2명의 스님과 주고 받은 수행에 관한 편지글을 모은 것이다. 서장(書狀)>
대혜선사는 어느 사대부에게 쓴 편지에서 시끄러운 세간에서 공부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세간의 번뇌는 활활 타는 불과 같으니 그 불길이 어느 때나 멈추겠는가. 시끄러운 곳에 있어도 대나무 의자와 방석 위에 앉아 공부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육왕사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천동사(天童寺). 이 절에는 당시 대혜선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굉지정각(宏智正覺ㆍ1091~1157)선사가 30년간 있었던 절이다. 그는 간화선과 병립했던 묵조선(默照禪)의 대가였다. 묵조선은 화두 없이 가만히 앉아 선정을 먼저 닦은 후에 지혜를 닦는 선법. 대혜선사와 굉지선사는 각각 1,000여명 이상의 제자를 거느리고 당시 선계(禪界)를 이끌었다.
대혜선사의 제자들은 묵조선을 ‘고목나무선’이라 부르고 굉지선사의 제자들은 간화선을 ‘주물선’이라 부르며 서로 비난했지만 두 선사는 서로를 이해하던 사이였다고 한다.
순례단을 이끈 고우 스님은 “굉지선사는 천동산에서 조용히 산 반면 대혜선사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을 간화선으로 활발하게 극복하며 살아갔다는 차이가 있지만 두 분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고 설명했다.
항저우(杭州)시 북쪽 임안(臨安)에 있는 천목산(天目山)은 <선요(禪要)> 의 저자인 고봉선사가 30년 동안 머물며 선풍을 드날렸던 곳이다. 몽골이 남송을 무너뜨리고 원(元)나라를 세우던 때 그는 저장성에서 가장 높은 해발 1,500m의 이 산에 들어가 수행에 전념했다. 선요(禪要)>
선사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자 밧줄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험한 바위 위에 ‘사관(死關)’이란 이름의 토굴을 지어놓고 15년 동안 수행하고 법을 설하다 입적했다고 한다.
지난해 중국 정부가 등산로를 냈다. 방 한 칸 넓이의 토굴 뒤 바위 틈에 선사가 물을 마셨던 샘이 있다. 선사가 사자암을 세웠던 터에 세워진 개산노전(開山老殿), 발우를 씻었다는 옹달샘 세발지(⒪ㆂ? 등 산 곳곳에 선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봉선사는 특히 ‘모든 중생이 본래 완성돼 있는 부처다’라는 선종의 입장을 강조해,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사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체 자리에 앉는 일 없이 오직 걸어 다니면서 화두를 참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른바 행선(行禪)을 했던 것이다. 그는 치열하게 수행을 하던 어느날 밤 도반이 떨어트린 목침소리를 듣고 활연대오했다고 전해진다.
대혜선사의 <서장> 과 고봉스님의 <선요> 는 중국에서 간행된 직후 고려에 전해져 수백년 동안 한국의 전통 강원에서 스님들의 선 수행 교재로 쓰여왔을 만큼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선요> 서장>
순례단은 이어 고봉선사가 선수행을 시작한 항저우시 정자사(淨慈寺), 대혜선사가 깨달음을 얻은 장수(江蘇)성 상주(常州) 천령사(天寧寺), 대혜선사와 고봉선사가 머물렀던 항저우시 경산사(徑山寺) 등을 둘러보며 선사들의 삶을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혜선사의 마지막은 선사들의 특유한 소박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수 십년 간 그를 모신 제자가 ‘스님의 열반송은 무엇입니가’라고 묻자 선사는 이렇게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는 것도 다만 이러하고/ 죽는 것도 다만 이러하네/ 게송을 남기고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무슨 유행인가.”
■ 中의 강남지역, 한국불교와 각별한 인연
닝보ㆍ항저우 등 옛날 중국의 강남(江南) 지역은 한국불교와의 인연이 각별했다.
항저우시 서호(西湖) 부근에 있는 고려사(高麗寺)는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義天ㆍ1055~1101)스님의 자취가 어린 곳이다. 의천스님은 1085년 불교 교류차 항저우의 혜인원(惠因院)에 머물렀고 귀국 후 이 사찰에 불경과 재정 지원을 했다. 그 후 이를 기념에 사찰 이름이 혜인고려사(惠因高麗寺)로 바뀌었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오래 전에 사라진 이 절의 자취를 6년에 걸쳐 찾아 우물터 등을 발견해 중국 정부에 복원을 요청했으나 이미 일본인들이 호텔을 지어놓았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가까운 곳에 부지를 마련해 3년 공사 끝에 남송시대 양식으로 복원해 지난해 5월 문을 열었다.
고봉선사가 머물렀던 천목산의 개산노전에는 고봉선사의 제자인 중봉명본(中峰明本)스님에게 1319년 고려의 심왕(沈王)이 하사했다는 법의(法衣ㆍ가사)가 고봉선사의 발우와 함께 보관돼 있다.
고봉선사는 특히 한국불교의 법맥(法脈)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전 각화사 태백선원장 고우 스님은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 普愚ㆍ1301~1380)스님은 원나라 석옥청공(石屋淸珙)선사의 법을 이었고 석옥청공선사는 급암종신(及岩宗信)선사의 법을 이었는데 급암선사와 고봉선사는 같은 스승을 모신 사이였다"면서 "고봉선사와 태고 보우스님은 종조부와 손자의 관계"라고 말했다.
고우스님은 "그 동안 고봉선사의 <선요> 를 강의하면서도 몰랐는데 이번 순례에 앞서 자료정리를 하다 이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면서 고봉선사와 한국불교와의 인연에 놀라워했다. 선요>
대혜선사의 <서장> 은 특히 보조 지눌(普照 知訥ㆍ1158~1210)스님과 관계가 깊다. 지눌스님은 지리산에서 <서장> 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지눌스님은 이후 이 책으로 스님들을 가르쳤으며, 이 전통은 800여년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서장> 서장>
고려 초기의 고승이었던 의통(義通ㆍ927~988)스님은 아육왕사에서 설법을 했으며, 나옹스님도 이곳을 참배했다.
또 항저우 인근에는 도선국사가 풍수지리를 배웠다는 중국 스님의 비석이 있다고 한다. 남송의 중심지였던 이 일대에는 고려의 스님들이 많을 때는 150명 가량 머물며 중국 불교와 교류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글ㆍ사진 닝보ㆍ항저우(중국)=남경욱 기자 kwnam@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