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선(3회 대상. 서울 중경고 졸업 .부산지법 판사)
“대입학력경시대회 문제가 어렵긴 어려웠죠. 당시 학원 강사 중에 대입경시대회 문제를 풀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1993년에 치러진 제3회 대입학력경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장윤선(33) 부산지법 판사는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대입경시대회의 여운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장 판사는 서울 용산구 중경고 재학시절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으나, 정작 대입경시대회에 출전했을 때는 아연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전국에서 우수학생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최상위권 학생간의 경쟁의 무대가 됐기 때문이다. “제가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둘지 가늠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대상을 받게 되면서 많은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대입경시대회는 그에게 자극제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정도면 됐다”는 자만심에 빠질즈음 대입경시대회를 치렀고, 어려운 문제는 그를 다잡게 만들었다. “당시에는 대학별 고사를 잘 봐야 우수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대입경시대회 문제가 대학별 고사보다 훨씬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경시대회 대상으로 자신감을 얻은 장 판사는 94년 오랫동안 목표로 삼았던 서울대 법대에 재수없이 입학했고, 99년에 제41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장 판사가 어렵기로 소문난 대입경시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정공법이었다. 그는 “대학별 고사 대비반에서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대학 진학 후에도 장 판사의 대입경시대회 추억은 계속됐다. 입학 후 캠퍼스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경시대회 동기’들이 적지 않았던 까닭에서다. “대상 수상자라는 사실이 많이 작용했죠. 사람들이 알아볼 때마다 살짝 민망하기도 했지만 경시대회 출신 선ㆍ후배와 우의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계기도 됐습니다.” 학창시절 경시대회 출신 동기는 웬만큼 안다고 자부했지만, 서울대 법대 출신 중 경시대회 동기가 많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출산으로 휴직 중인 장 판사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다. 판사 생활 5년간 민사사건을 주로 담당 해왔던 역할에 어울리게 전공은 민법이다. 못 말릴 학구열은 대입경시대회 출신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아직도 학문적 경험과 실무 경험을 축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임 없이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라제기 기자
▦문일준(4회 장려상. 서울 휘문고 졸업ㆍ군의관)
“대입학력경시대회는 제 인생을 바꾸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군의관으로 복무 중인 이비인후과 전문의 문일준(32)씨는 1994년 제4회 대입학력경시대회를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잊을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문씨는 휘문고 재학시절 자신의 실력을 뚜렷하게 알 수 없었다. 성적이 조금씩 올라 상위권엔 들었지만 담임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은 그의 실력에 물음표를 던졌다. “서울대 의대 입학이 꿈이었죠. 저 스스로도 힘들다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해 합격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문씨는 대입경시대회에 나가 장려상을 받은 뒤 자신의 실력을 명확히 알 수 있었고 자신감도 덩달아 얻었다. 문씨는 “경시대회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다줬다”고 말했다. “전국 상위권 학생들 중에서도 제가 상당히 높은 순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상까지 받았으니 자신감은 당연하게 붙더라고요.”
문씨는 경시대회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공부에 가속도를 붙였다. 서울대 의대는 좀더 명확하고 현실적인 목표로 다가왔다. “담임과 부모님은 서울대 의대 도전에 주저 없이 동의해주셨습니다.” 결국 문씨는 95년 원했던 대로 서울대 의대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경시대회 당일 서울고 교정의 풍경은 아직도 문씨 머리 속에 뚜렷하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대형 버스들이 줄지어 서고 학생과 학부모, 선생님들로 북새통을 이뤘던 교문. “그 많은 학생들이 대입경시대회를 위해 모였다고 생각하니 경쟁심이 자연스레 들더군요. 전국 각 학교를 대표하는 상위권 학생과 경쟁해 좋은 성적을 거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험장에 들어섰습니다.”
문씨는 당시에도 어렵기로 ‘악명’을 떨쳤던 경시대회 준비를 위해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집중적으로 풀었다. 자신의 실력을 측정하는 게 목표였지만, 모교의 명예가 달렸으니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별 고사도 고난이도 문제를 풀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합격이 좌우 되던 시절입니다. 일본 도쿄(東京)대 입시문제를 비롯해 어렸다는 문제는 모두 모아 풀면서 실력을 길렀죠. 막상 경시대회 문제를 접하니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문제가 어려웠습니다.”
문씨는 군복무를 마친 후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다. 서울대 병원에서 전임의 과정을 마친 뒤 교수로서 의료연구와 의료활동에 매진하겠다는 각오다. “의학을 공부하고 의술을 펼치는 사람으로서 이비인후과는 보람을 크게 얻을 수 있는 전공입니다. 대입경시대회는 제가 원했던 의사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지요.”
권대근 인턴기자
▦오지영(3회 장려상. 서울 중경고 졸업ㆍ올리버&와이만 금융 컨설턴트)
“큰 상을 받았던 것도 아닌데 제가 인터뷰할 자격이 있나요?”
1993년 제3회 대입학력경시대회 장려상을 받았던 오지영(33)씨는 자신이 수상한 상의 무게가 좀 가볍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경시대회가 본격적인 화제에 오르자 금세 활기찬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서울 강남구 진선여고를 졸업한 오씨는 학력경시대회를 전국 최고의 시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오씨는 “처음엔 이러저러한 시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시험장에 들어서서 전국 각지서 모인 우수 학생들을 보니 부담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학교를 대표해 출전하는 대회여서 경쟁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선생님들도 입상 성적에 대해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어요.”
오씨는 당시 진선여고 대표로서는 유일한 입상자였다. 큰 상은 아니었지만 선생님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좋았고, 전국 최고 수준의 학생들 사이에서 거둔 성과라 만족했다. “수학문제를 풀다가 시간이 부족해 당황했었는데 상을 받은 후 이 정도 성과면 제가 목표로 하는 대학은 충분히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오씨는 그 해 대학 불합격의 쓴 잔을 마셔야만 했다. 서울대에 지원했지만 당시 치러진 대학별 고사에서 1교시 답안을 밀려서 쓴 것이 불합격을 자초했다. “시험 내내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되는 느낌이었죠. 학력경시대회 수상자 중 재수해서 대학 간 사람은 아마 제가 유일할 겁니다.” 오씨는 재도전끝에 9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오씨는 국내 대기업을 거쳐 2003년부터 외국계 금융기업인 올리버&와이만의 금융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주요 업무는 손해보험사나 은행 등 금융기관의 중장기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것. 오씨는 “일반기업에 비해 업무강도가 강하지만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 좋다”고 회사생활을 소개했다.
학력경시대회 출신 알파걸로 당당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는 오씨는 후배들에 대한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특히 외국계 컨설팅 기업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을 염두에 둔 조언을 많이 했다. “자신이 얼마나 탐색하고 노력하느냐에 성과가 나타납니다. 학생들이 미래를 위한 준비를 일찌감치 시작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인턴경험도 풍부하게 쌓고 학점관리를 비롯해 어학준비도 탄탄히 하는 게 좋습니다. 생각만 하고 고민하는 것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활용해 최대한의 성과를 얻어내는 것이 현명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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