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기금이 주식시장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웬만한 기관이나 외국인 투자가들도 말하기를 꺼리는 개별기업 오너의 진퇴문제까지도 명백한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증시의 '큰손 중 큰손'인 국민연금의 독자행보에 기업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12일 복지부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주주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를 열어 14일 열리는 현대차 주주총회에서 정몽구 회장의 등기이사 재선임에 반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또 두산인프라코어 주총에서 박용성 회장의 등기이사 재선임도 반대키로 했다.
국민연금의 이 같은 결정은 흠결있는 오너의 경영참여를 반대할 수 있다는 국민연금법에 따른 것이다. 이 법은 의결권 행사지침에서 "기업가치의 훼손 내지 주주권익의 침해 이력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반대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비자금 조성 및 업무상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돼 현재 대법원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고, 박용성 회장은 공금횡령 혐의 등에 대한 유죄가 확정된 상태다. 따라서 규정대로 표결할 경우, 국민연금은 이들의 이사 재선임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다.
이날 전문위원회에선 상당한 격론이 오간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성적이 양호하니 오너의 등기이사 선임문제는 그냥 넘어가자는 '현실론'과, 주주가치가 우선인 만큼 규정대로 가야한다는 '원칙론'이 팽팽히 맞섰고, 결국 표결까지 가는 진통 끝에 반대의견을 채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연금은 최근 들어 '의결권 행사'카드를 통해 기업의 감시자로 급부상한 모습이다. 지분 1%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는 국민연금은 지난해 1~11월 투자한 기업 중에는 436건의 주총에 참석해 5%에 가까운 반대의견을 냈다.(표 참조) 과거 '거수기'에서 벗어난 이 같은 국민연금의 독자행보에 대해선 '국민의 돈을 운용하는 만큼 당연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증권업계의 한 자동차 담당 애널리스트는 "국민연금의 결정이 오너십을 부정하기 보다는 기업경영을 더 투명하게 잘 하라는 주문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는 불만스런 표정이 역력하다. 한 재계 고위인사는 "소버린이나 칼 아이칸 같은 외국인 기업사냥꾼도 아니고 우리정부가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왜 이런 결정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 회장과 박 회장의 경우도 과거의 허물보다는 기업을 키운 업적과 경영능력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민연금이 형식논리에 얽매여 경영능력이나 현실에 눈감고 있다거나, 기업투자 의욕에 찬물을 끼얹고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자해행위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번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몽구ㆍ박용성 회장의 등기이사 재선임안 통과엔 별 무리가 없을 전망. 국민연금은 현대차 지분 4.56%, 두산인프라코어 지분 2.92%를 보유해 각각 6대, 4대 주주지위를 확보하고 있지만, 사측 우호지분이 워낙 많아 표결향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현대차 지분을 보유한 미래에셋자산운용(1.54%) 삼성투신(0.97%), 하나UBS 등 기관들은 정 회장의 등기이사 선임에 찬성하고 있다.
현대차 측은 이날 "총수의 등기이사 선임은 책임경영을 구현해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한 것"이라며 "아울러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계속하겠다"는 입장만 확인했다.
이태규 기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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