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현대회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는 누굴까? 생존 화가 가운데 가장 크고 빛나는 금자탑을 세운 이로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꼽는 이들이 적잖다. 왜냐하면, 리히터는 사진의 등장 이후 ‘진실의 담보하는 매체’로서의 권능을 잃은 회화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도 처음엔 별 볼 일 없었다.
1932년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 시에서 태어난 그는, 종전 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념에 경도된 전문적 미술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추상미술에 호기심을 느낀 그는, 1961년 모스크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서독으로 도망쳤고, 이후 추상표현주의의 아류작들을 그렸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동년배인 지그마 폴케를 만난 이후다.
회화의 관습적 스타일에 천착하던 리히터는, 미국의 팝아트를 독일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던 폴케 덕분에 ‘그리는 방법’에 눈떴고, 1962년 비로소 사진을 재현하는 그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일명 ‘사진회화’-사진을 노예로 삼는 새로운 메타 회화-가 시작된 것.
그러나, 폴케가 인쇄물의 재현성을 문제 삼는 데 몰두하느라 작품 세계를 크게 확장하지 못한 것과 달리, 리히터의 작업 세계는 사진의 데이터베이스적 성격, 추상회화의 복제성 등을 작업 내로 끌어들이며 무섭게 팽창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리히터는 회화의 역사를 문제 삼으며, 현대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던 ‘역사화’를 부활시켰다. 1972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된 ‘48점의 초상화’가 대표사례다.
화가는 백과사전에 게재된 인물사진들을 스크랩하고, 그 가운데 48장을 추려 그림으로 확대ㆍ재현ㆍ전시했다. 선정된 48인은 스트라빈스키, 차이코프스키, 폴 발레리, 토마스 만, 카프카, 아인슈타인, 오스카 와일드 등,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 사이에 활동한 남성 위인들이다. 정치가를 비롯한 혹세무민하는 사상가 부류는 배제됐고, 또한 미술가들도 포함되지 않았다는데, 목록으로 보아, 알려지지 않은 부가적인 원칙이 몇몇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48점의 초상화’는, 그리는 행위를 ‘사진의 과정’에 외삽하면서, 회화가 사진에 내줬던 초상기록의 권역을 되찾고, 사진과 회화의 역사적, 동시대적 관계를 문제 삼는다. 작가는 개념미술적인 사진 데이터베이스의 운용을 통해 역사적 논평을 던지는 데도 성공했는데, 이는 동시대의 회화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다.
게다가 이 초상화 48점엔 특별한 에피소드도 전한다. 소위 ‘유형학적 사진’을 찍는 일군의 독일 사진가들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토마스 슈투르트가, 바로 이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것. 슈투르트에게 베른트-힐라 베허 부부를 사사하라고 권유한 장본인도 리히터였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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