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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2000년대의 창조 폐허 백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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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2000년대의 창조 폐허 백조' 입니다

입력
2008.03.0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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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동인 8명이 등장한다. 그들과 관객의 손엔 <텍스트 심포니 : 문학의 완전한 불협화음을 꿈꾸며> 란 제목의 대본집이 들렸다. 1악장이 ‘연주된다’. 8명이 같은 문장을 제각기 다른 속도와 톤으로 읽기 시작한다. “루는 발광하며 미끄러지는 무한이다. 루는 다시 온 동어반복이다. 루는 이미 균열된 언어에 더 큰 구멍을 내려는 무리이다.

루는 언어의 음악적 긴장이다. 루는 하나의 단어로 우주의 모든 것을 말한다. 루!” 객원 동인 허남준씨의 소음을 닮은 기타 연주까지 보태져 그야말로 불협화음이다. 2악장은 영상물로 시작된다. 한강 유람선에서 찍은 장면-깍깍대며 어지럽게 나는 새떼, 철교 위를 달리는 열차, 깨진 얼음이 둥둥 뜬 수면, 텅빈 선실 복도를 울며 걷는 아이 등-이 몽타주 기법으로 편집됐다.

한 동인이 걸어나와 열댓 개 단어를 줄줄 읊곤 관객에게 뜻을 묻는다. 갑자기 소리친다. “국어사전의 사전적 의미를 지금 당장 폐기하십시오!” 그리곤 칠판에 거침없이 적어내려간다. ‘시멘트-그녀와의 이별, 휘발유-당신의 가슴에서 태어난 새…’.

■ 동인으로 그리는 문학 지형도

등단 작가들이 꾸리고 있는 문학 동인(同人)의 면면을 통해 2000년대 문학 판도를 그려보는 의미있는 행사가 기획됐다. ‘문지문화원 사이’가 주최하고 서울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문학 동인 페스티벌’.

언어 사용의 통념과 관습을 뒤엎는 ‘텍스트 실험집단’을 표방하며 2000년대 등단한 20, 30대 작가들이 결성한 동인 ‘루’가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퍼포먼스 공연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11월까지 매달(8월 제외) 첫번째 토요일마다 문학 동인들이 자신들의 지향을 밝히고 독자와 소통하는 시간을 갖는다. 참가 동인은 총 8팀.

80년대 결성돼 현재 시 동인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시힘’과 ‘21세기 전망’, 2000년 전후로 결성돼 새로운 감각의 작풍을 선뵈고 있는 시 동인 ‘천몽’ ‘불편’ ‘인스턴트’와 소설 동인 ‘작업’, 그리고 최근 결성된 ‘루’와 ‘대충’까지 범위가 다양하다(표 참조).

문학 위기 담론과 맞물려 상업주의가 강화돼 가는 문학 시장의 이면에서, 함께 문학적 정체성을 논의하고 창작을 격려하는 현장 작가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것이 이번 행사의 취지.

문지문화원 사이 김경성 팀장은 “일반독자 입장에선 서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작품 위주로 문학을 향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며 “아직 덜 알려졌지만 저마다의 문학적 영토를 개척하고 있는 동인들을 만남으로써 한국문학이 어떤 갈래로 나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최측은 참가 동인에게 프로그램 구성 및 진행 일체를 맡긴다는 계획이다.

■ 2000년대 문학 동인의 존재 의미

1920년대 <창조> <폐허> <백조> 를 위시한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엔 전문 작가 그룹이 나타났고 ‘문단’이란 근대적 제도가 형성됐다. 평론가 김춘수씨는 “초창기 한국문학사에서 동인은 일종의 에콜(ecoleㆍ학파)의 형태를 띠면서 이후 동인들이 자기 이념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게 일반화됐다”고 설명했다.

에콜로서의 동인은 80년대까지 문학사의 중추를 담당했다. 시 부문만 놓고 보면 해방 이후 50년대엔 한국시의 국제화를 주장하며 ‘신시론’을 펼쳤던 ‘후반기’ 동인, 60년대엔 내면 탐구와 언어 실험을 천착하며 한국시의 지평을 넓힌 ‘현대시’ 동인이 대표적이다. 70년대엔 난해시와 자연 서정시를 비판하며 소외 계층의 삶에 다가서는 ‘반시’가 이름을 떨쳤다.

당시 양대 문예지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 이 권력에 의해 폐간됐던 80년대엔 정치적 저항과 표현의 자유를 지향하는 무수한 동인이 결성됐다. 이 중 ‘시와 경제’ ‘오월시’ ‘시운동’이 특히 주목 받았다.

90년대 이후 동인 활동은 눈에 띄게 위축됐다.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급증한 데다, 평론가 그룹 중심으로 운영되는 문학잡지에 문학적 권위가 실리면서 작가에겐 동인 활동보단 이들의 인정을 받는 일이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2000년대 동인들은 오히려 이런 환경 때문에 동인의 존재 의미가 더 커졌다고 말한다. ‘대충’ 동인을 주도하고 있는 소설가 박성원씨는 “주요 문학출판사나 문학잡지들이 더이상 에콜의 기능을 하지 않는 상황인 만큼, 동인이 문학에 대한 정체성과 담론을 형성하는 주체로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시힘’ 동인인 나희덕 시인은 “작품 발표 공간이 넓어지고 문학적 인정투쟁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동인의 사명은 다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서로 창작을 독려하고 각자의 문학적 실험을 더 자유롭게 행할 수 獵?울타리로서 동인이 새롭게 감당할 몫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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