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언 지음 / 민음사 발행ㆍ276쪽ㆍ1만원
여든아홉 신(scene)의 숏컷, 혹은 짤막한 89개의 장(章)이 이어붙은 김도언(36ㆍ사진)씨 첫 장편은 읽고 나면 저도 모르게 엔딩 크레딧과 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인 소설이다(각 장엔 ‘#’와 숫자로 조합된, 신 넘버가 붙어있다).
작중 화자는 마음만 먹으면 등장인물의 마음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전지적 관찰자지만, 대개의 장면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그의 눈은 카메라를 닮았고, 그의 서술은 시나리오처럼 건조하다.
올해 등단 10년을 맞는 김씨가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풍경> (2004), <악취미들> (2006)에서 보여준, 삶과 세상 배면의 불온한 욕망을 후비는 집요한 자세와는 정반대에 가깝다. 악취미들> 철제계단이>
‘카메라 눈’의 차가운 시선이 닿는 곳은 궁핍하고 비뚤어진 인간들의 지리멸렬한 일상이다.
파계승인 아버지와 한센병 환자 어머니를 둔 변두리 학원 강사 ‘선재’, 군대 간 남편을 기다리며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수발하는 ‘소라’, 사촌형의 학원에 기식하며 다른 강사들에게 군림하려 드는 ‘철민’, 계부에게 성폭행 당한 기억을 지닌 채 성적으로 방종하는 ‘미진’과 그녀의 연하 동거남이자 소라의 동생인 건달 ‘호준’….
저마다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안고 울분, 체념, 위악으로 일관하는 이들의 삶은 우울하다. 주변에 정치력을 발휘하긴커녕 전염조차 되지 않고, 그저 자신을 함몰시킬 뿐인 이 멜랑콜리는 사소하기 그지없다.
제 우울에 탐닉하던 나르시시스트들 중 일부는 서서히 상대에게 눈을 돌리지만 그 눈맞춤엔 온기가 거의 없다. 집주인-세입자 관계였던 소라와 선재가 서로 끌어안을 때-소설 끝에 놓인 이 묘사 부분은 완벽한 미장센이라 할 만한, 근래 보기 드물게 마음에 꼭 들어차는 결말이다- 뜨거워지는 것은 육체일 뿐 그들의 휑한 마음은 아닐 것이란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이는 그저 독자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소설 첫 장의 신 넘버는 #89이고, 이후 #1~#88이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작품 종지부는 도돌이표다. 지리멸렬의 영겁회귀다. 서로 몸을 포갠 선재-소라 옆에서 뱅그르르 돌며 결말의 아름다운 미장센을 완성하는 반지는 이 원형 순환 속 작은 동심원이다.
그 반지는 누나(소라)의 패물함에 손댄 호준에 의해 미진에게로 건네지고, 미진이 소홀히 간수한 탓에 동료 강사 선재의 손에 들어와 진심 없는 사랑들-소라와 남편, 호준과 미진, 선재와 소라-을 잇댄다. 비루한 삶처럼 지루한 사랑도 돌고돌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예전 소설집들처럼) 내부로 파고들든 (이번 장편처럼) 외부에서 응시하든 김씨의 삶에 대한 동정 없는 시선은 한결같은 셈이다.
그는 “이번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못난 존재여서 지극히 세속적인 방법으로 욕망하고 다투고 병들고 질투한다"며 "그럼에도 이들 모두의 생은 관찰되고 존중돼야 하는데, 모든 삶은 예외 없이 비장하게 죽음과 맞서고 있기 때문”이라고 ‘작가의 말’에 적었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터넷한국일보는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인터넷한국일보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