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은씨가 돌아왔다. 입맛 당기는 요리 만큼이나 맛깔진 글로 음식 이야기를 전해주는 음식 칼럼니스트다. 2004년 12월부터 한국일보 ‘프리’ 섹션에 1년여 ‘박재은의 음식 이야기’를 연재했던 그가 새롭게 매주 토요일자 한국일보 ‘토일 엔터’에서 독자와 만난다. ‘박재은의 명품 먹거리’에서 그는 진정한 맛의 명품이 무엇인지 보여줄 것이다.
‘희소성’ ‘맛’ ‘영양’을 다 갖춘, 게다가 가격까지 부담없는 식재료가 뭐 없을까 생각하며 걷고 있었다. 봄기운이 움트려 하는 제주 제주시 동문시장을 헤맨 지 벌써 40분여.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시장을 잠깐 벗어나려 돌아서는데, 할머니 한 분이 길가에 앉아 식재료 몇가지를 팔고 계셨다.
얌전히 앉아계신 모습이 무척 여성스러우셨던 할머니에 끌려 나도 모르게 다가섰다. 작은 접시에 수북이 담긴 저것은 고동 아닌가? 바닷가에 발 담그고 서 있노라면 바위마다 까맣게 붙어 빛나고 있는 껍질. 그 껍질 안에 초록빛 속살이 숨어 있는 그것이 고동인데. “할머니, 이거 고동이에요?” 여쭈었더니 이렇게 답하셨다. “보말.”
■ 고동 말고 보말
제주도 말로 고동이 ‘보말’인데,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또 아니다. “뭐야~”라고 반응할 독자들이 눈에 선한 대목이다. 보말은 크게 ‘먹보말’과 ‘수도리보말’로 나뉘는데, 맛이 좋은 것은 후자 쪽이다.
육지에서 가끔 보는 고동은 겉모양이 둥글고 까만 먹보말이 대부분. 맛이 떨어진다. 각이 지고 암갈색을 띄는 수도리보말의 맛이 좋다. 제주에서는 둘 다 나지만, 시중에서 만나는 보말은 거의 수도리보말이다. 그러니까 육지에서 흔한 보말과 제주에서 흔한 보말이 같지만 다르다는 거다.
각설하고 5,000원에 보말을 사기로 하고 할머니께 조리법을 여쭈었더니 며느리 가르치듯 설명해 주셨다. “요래, 조물조물 두 번 씻어. 꺼믄 물이 막 나오면 버려. 두 번 씻고 나온 물은 쪽 따라서 모아. 보말만 물에서 건져 불린 쌀하고 볶다가 아까 그 씻은 물 부어서 죽을 끓여.”
들은대로 조물거리며 씻고, 그 물은 쪽 따라두었다가 쌀 볶을 때 붓고 하여 죽을 한 번 쑤어 보았다. 만화 <신의 물방울> 에서 인물들이 와인을 마실 때마다 “음~” 하고 감탄하며 꽃밭이며 사랑의 여신이 떠오르듯, 보말 죽 한 입을 꿀떡 하고 나니 너른 갯벌이 떠올랐다. 신의>
모자란 실력으로 할머니께 들은 조리법만으로 만들었지만, 싱싱한 보말의 맛이 진해서 바닷가를 절로 떠올릴 정도로 별미였다. 양념 없이 참기름만 살짝 둘러도 맛이 풍부했다. 효능은 알려진대로 숙취 해소나 자양강장에 그만. 정말 반 그릇을 먹다보니 땀이 송송 맺혔다.
■ 보말 국, 보말 국수
보말에 ‘꽂힌’ 나는 본격적으로 보말을 맛있게 다룬다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대정 5일장터 코앞에 자리한 옥돔식당(064-794-8833). 순 서울 분으로 제주에 시집 와서 지금에 이르신 주인장 차옥자 사장님을 직접 뵈었다.
다른 계절 메뉴나 식사 메뉴도 있지만 차 사장님의 대표 메뉴는 역시 보말 국, 보말 칼국수. 모두 보말로 낸 진국으로 만들어지는데, 보말 국은 담백하고 칼국수는 보다 진하다.
요리하는 사람이라 말하기 민망하게 ‘된장을 좀 푸셨나봐’ 생각했을 정도로 국물이 짙었다. 맛도 짙고 색도 짙고. 사장님은 질색하시며 “된장은 웬 된장? 보말만 우려 끓여도 얼마나 진한데.” 서울 말투로 답하셨다.
보말 국에는 작은 정방체로 썰인 두부가 들어가 있고, 보말 칼국수에는 유부와 김 가루가 더해졌다. 둘 다 잘게 다진 청양고추를 얹어 먹는 게 맛이라고, 청양고추를 듬뿍 얹어 휘휘 저었더니 국물 맛이 또 달랐다. 국물을 크게 한 술 떠먹으면 다시 펼쳐지는 바다 풍경. 정말 파도 소리가 들릴 듯 끝내주는 맛. 아, 제주에 살고 싶어라 하는 순간이었다.
■ 보말 볶음
종종 무언가에 한번 맛 들이면 일주일쯤 연일 먹을 때가 있다. 제주 동문시장을 걷다 우연히 보말 파시는 할머니를 만났고 그날 저녁에는 보말 죽, 다음 날에는 보말 국과 보말 칼국수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또 보말이 궁금했다. 다시 동문시장으로.
으스스한 바람이 심상치 않더니 시장 초입 그 자리에 할머니가 안 보였다. 안 나오신 날이었다. 이런, 할 수 없이 시장 안으로 들어가 혹시 보말을 갖다 놓은 수산집이 있을까 어슬렁거렸다. 유경수산(064-753-5387)을 지나다 보말을 봤다. 냉큼 5,000원어치 사들고 안주인께 슬쩍 조리법을 여쭸다.
죽이나 국이나 다 맛있고, 볶아 먹어도 괜찮다는 말씀에 귀가 솔깃. “볶아도 먹어요? 어떻게요?” “야채 썰어서 같이 볶다가 나중에 참기름이나 좀 넣으면 맛있지.” 요리 강좌가 이어진다. “고춧가루 같은 거 안 넣어요?” “안 넣어, 안 넣어. 그냥 먹는 거야.” 하긴 그 싱싱한 보말을 담백하게 볶아 왜 고춧가루 범벅으로 먹겠는가? 참으로 생각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군. 후회하면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문을 나섰다.
보말 볶음은 요리 솜씨가 별로 없어도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으니 남자분들도 술안주로 뚝딱 만들 수 있다. 보말과 마늘을 몇 톨 작은 냄비에 담고 올리브유를 자작자작 부어 마늘이 부드러워질 정도로 익히면 빵에 발라먹을 수 있겠다. 스페인의 한입거리 안주, 타파스(tapas)처럼 얇게 썬 빵에 발라 차가운 백포도주 한잔과 기분을 내 볼 수도. 허나, 뭐니 해도 산지에서 먹는 그 방법 그대로가 으뜸이다.
양식으로는 기를 수 없으니 전부 자연산에, 일일이 손으로 속살을 빼야 하니 그 정성은 또 얼마인가. 국물만 우려도, 죽만 쒀도 몸에 이롭고 맛 좋으니 진짜 명품이다. 바다 속 저 깊은 땅 냄새 물씬 나는 명품 보말 먹으러 제주에 또 언제 가려나.
<보말볶음>보말볶음>
1. 보말을 두어번 물을 갈아가며 씻는다.
2. 씻은 마지막 물은 따로 둔다.
3. 각종 야채는 같은 크기로 썰어 준비한다.
4. 팬에 기름을 두르고 보말과 3의 야채를 볶는다.
5. 4에 참기름을 두르고 잘게 다진 파슬리나 깨를 뿌린다.
박재은ㆍ음식에세이 <밥 시> 저자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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