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론소 꾸에또 지음ㆍ정창 옮김 들녘 발행ㆍ376쪽ㆍ1만원
공들여 가꾼 외모, 사랑스러운 아들과 무던한 남편, 능력을 인정해주는 직장, 언제든 일상의 도피처가 돼주는 멋진 정부(情夫)…. 만족스러운 인생을 누리던 40대 여기자 베로니카 앞에 고등학교 동창 레베카가 불쑥 나타난다.
베로니카에겐 뒤가 켕기는 추억과의 조우다. 출장 후 귀국길 비행기에서 레베카를 우연히-어쩌면 레베카가 치밀히 준비한 것일지도- 만난 이후 베로니카의 생활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
“팔뚝이 송유관만 한… 엄청나게 비대한 몸뚱이”로 ‘고래 여인’이란 별명을 가진 레베카는 베로니카의 주변을 집요하게 맴돈다. 수시로 회사에 전화 걸고, 어디에든 찾아오고, 숨겨둔 애인의 집 바로 윗층에 이사온다.
레베카를 피하던 베로니카는 그녀가 하굣길 아들에게 접근했다는 걸 알고 소스라친다. 결국 제 발로 레베카를 찾아가지만 자신을 “배신자”라 일컫는 그녀에게 진심과 다른 폭언-“이 똥만 가득 찬 뚱보야.”-만 퍼붓고 자리를 뜬다.
베로니카의 간헐적 회상에서 독자는 학창 시절 두 사람 사이를 비튼 결정적 사건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하지만 베로니카도 레베카도 기억의 봉인을 뜯는 일을 두려워한다.
너덧 번 마주앉아 나누는 둘의 대화는 핵심을 빗겨가면서 서로의 상처를 덧낼 뿐이다. 그 비밀이 밝혀지는 작품 말미까지 이야기의 긴장은 팽팽하다.
이 긴장 위에 페루 작가 알론소 꾸에또(54)는 한 중산층 여성의 의식 흐름을 섬세하게 그린다. 원한에 찬 옛 친구의 도발로부터 우아하고 안락한 삶을 지키려는 안간힘 한편으로, 과거에 대한 죄책감과 현재 삶에 대한 불안과 허무에 마음이 기우는 베로니카의 이중 심리가 내 것처럼 생생하다.
베로니카에게 듣고픈 말을 듣지 못한 레베카는 끝내 섬뜩한 폭력으로 답한다. 이로써 두 사람은 서로와는 물론, 자신의 위선ㆍ위악적 삶과도 더는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파국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깨서 흩어버리는 비극적 결말이 아닌, 차분히 추스르며 다독이는 카타르시스의 시간이다. 병상의 베로니카와 면회 온 레베카가 나누는 저물녘의 대화는 쓸쓸하지만 서로를 위무하는 온기가 있어 차갑지 않다.
이 작품은 중남미 굴지 출판사 ‘플라네타’와 스페인 정부의 문화재단 ‘카사 데 아메리카’가 2007년 공동 제정한 ‘플라네타-카사 데 아메리카 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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