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 문학과지성사"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시인, 기자였던 기형도가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뇌줄중. 29세였다. 그는 자신의 첫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입 속의 검은 잎> 은 기형도가 세상을 떠나고 두 달 후에 나온 유고시집,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이다. 입>
1980년대의 마지막 해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숨진 기형도와 그의 유일한 시집은 이후 세기말의 연대 내내 그리고 세기가 바뀌어서도 한국문학의 아이콘이 되어 있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비평가 김현(1942~1990ㆍ그는 기형도 시집의 해설을 쓴 이듬해 사망했다)이 기형도 시의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을 분석하고 그것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한 뒤 “나는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라고 했건만, <입 속의 검은 잎> 은 수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선택하는 스테디셀러다. 그리고 그의 시는 노래로, 연극으로, 영화로, 소설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입>
무엇이 김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나와 죽음은 서로를 지배하는 각자의 꿈’(‘포도밭 묘지1’에서)이 되었다고 한,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시 ‘오래된 서적’에서)라고 한,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미빛 인생’에서)라고 한, 저 어두운 기형도의 시를 계속 읽히게 하는 것일까. 그의 시에서 보이는 유년시절의 가난과, 사랑을 얻지 못한 절망과, 시대에 대한 허무와, 죽음에 대한 예감이, 곧 우리 자신의 아픔이기 때문일까.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는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빈 집’ 전문).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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