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하랴”라는 속담이 있다. 오죽하면 그러겠느냐고 은근한 동정까지 담아 바라보았을 만큼, 전통사회에서 처가살이는 비정상적이고 예외적인 모습으로 비쳤다.
그런데 왜 하필 ‘겉보리 서 말’인가. 겉보리는 도정을 하지 않아 겉껍질이 남은, 보리쌀이 되기 전의 보리 알곡이다. 알곡을 도정하면 대개 절반으로 양이 줄어든다. 겉보리 서 말은 보리쌀로는 한 말 반 쯤이고, 성인 한 사람의 한 달 양식이다. 그것이 처가살이를 면할 수 있는 최소 기준이었으니, 옛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얼마나 고달팠던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한편으로 이 속담은 쌀에 비해 한참 값어치가 떨어졌던 보리쌀이 살림살이 형편을 재는 기준일 정도로 곡식이 소중했음을 일깨운다. 40년 전만 해도 고향 산골에서는 돈 대신에 쌀이나 보리쌀로 무엇이든 살 수 있었다.
보리쌀 한 되만 주면 복숭아 한 자루를 받았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하루 종일 땅에 들러붙어 일하고 밀가루 한 포대를 받았고, 봉건사회의 노예에 비해 별로 나을 게 없는 고된 머슴살이의 대가가 1년에 고작 쌀 한 섬이었다. 노동의 가치가 워낙 형편없기도 했지만, 그만큼 곡식의 값어치가 컸던 셈이다.
■생활습관과 사고방식도 그에 맞춰졌다. 쌀 한 톨을 아끼고, 콩 하나도 나눠 먹었다. 월급날이면 넉넉한 사람은 가마니로, 쪼들리는 사람은 봉지로라도 쌀을 사 들고 귀가했다. 일단 양식만 확보하면 마음이 든든해졌다.
1970년대 이후 이런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고, 이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 오히려 아이들이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들 걱정이고, 한 숟가락만 뜨고 남은 밥이 별 거리낌없이 그대로 버려진다. 먹을 거리마저 소홀히 여기는 아이들에게 물건을 아끼라고 아무리 얘기해봐야 헛일이다.
■밀과 옥수수 콩 등 주요 곡물의 국제가격이 급등, 농산물 발 물가상승인 ‘애그플레이션(Agflation)’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밀가루가 주원료인 라면이나 과자 값이 잇따라 오르고, 자장면이나 칼국수 등도 가격이 뛰어 서민들의 체감물가가 하루하루 다르다.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는 저소득층을 위한 지원책이 절실하다.
곡물가격 급등의 주된 요인이 작황 부진이란 점에서 꼭 오래 지속될 현상이라고 단정하긴 이르다. 곡물 가격이 하루 빨리 안정되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모처럼 곡물의 가치에 눈길이 미친 이 기회가 국민 모두에 식량과 물건의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