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미술관에 나타났다. 그 뒤로 7명의 계열사 ‘사장님들’이 따른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4일 저녁 ‘불멸의 화가-반 고흐전’을 관람하기 위해 전계열사 사장단과 함께 서울시립미술관을 찾은 현 회장의 작품 관람을 동행했다.
고흐의 ‘자화상’ 앞에 선 현 회장이 꽤나 오래 머무른다. “고흐의 어떤 면이 좋으냐”는 질문에 그는 “특유의 노란 색을 좋아해요”라고 답한다. 그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단지 ‘자화상’의 화려한 색채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뜨면서 경영자로 변신한 지 올해로 5년. 그간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쉼 없이 달려온 그다. 지금 그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고 있을까. “글쎄요. 다른 사람들이 평가해 줘야지요. 다만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다 했습니다.” 미소를 지었지만 단호한 모습에서 그간의 맘 고생이 읽힌다.
“(회장 취임 후)항상 힘들었습니다. 사람을 잘 믿는 편이었는데…처음 그게 흔들렸어요. 취임 초기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얼마 안돼 어금니가 빠졌습니다. 불안감에 저도 모르게 자다가도 깨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나 봅니다.” 지난 4년 여를 회고할 때는 단호함 마저 보였다. “(회장 자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땐 정말 외로운 자리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몽헌 회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가정 주부에서 난파 직전에 있던 그룹의 최고경영자로 변신한 현 회장. 그가 경영에 뛰어든 이후 현대그룹은 거짓말처럼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2002년 6조원이던 매출은 지난해 9조5,000억원대로 50% 이상 증가했다. 2002년 적자이던 영업이익은 지난해 6,700억원의 흑자를 냈고, 부채비율은 같은 기간 353%에서 158%로 줄었다. 현 회장은 “오늘의 결실은 옛 현대 정신이 일궈낸 것”이라며 직원들에게 공을 돌렸다. 현대 특유의 추진력과 뚝심이 만든 결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특히 그룹의 모회사 격인 현대건설 인수에 대한 의지는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룹의 최대 현안이 무엇이냐”고 묻자 현 회장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현대건설을 되찾는 것이다”고 말했다. “(현대건설은) 원래 우리그룹에 속해 있었고, 몽헌 회장이 가장 애착과 정성을 쏟았던 회사”라고 했다.
현대건설 인수에 필요한 자금 확보도 이미 2,3년 전에 준비가 됐다고 공개했다. 그는 “최근 현대건설의 주가가 많이 올라 인수가격이 2배 이상 높아진 게 사실이지만 컨소시엄으로 자금을 만들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 가격이 높아도 반드시 인수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현대건설 인수의 최대 경쟁자가 될 현대중공업이 부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는 “그 쪽(현대중공업)은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쪽으로 가고 있어 오히려 더 불리하지 않을까요”라고 했다. 최근 정몽준 의원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 게 오히려 현대건설 인수에는 ‘특혜 논란’ 등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거운 얘긴 그만해요, 이렇게 사장들하고 전시회에 같이 온 게 회장 취임 후 처음인데 정말 좋네요. 그 동안 생존경쟁을 벌이느라 여유가 없었는데, 앞으로는 자주 이런 기회를 가져야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품인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없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그룹 내 크고 작은 난관을 극복하고 4년여 만에 안정된 경영 체제를 확립한 현 회장. “경영을 해보니까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를 보고 많은 여성들이 CEO의 꿈을 품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며 말을 맺었다
송영웅 기자 herosong@hk.co.kr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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