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우익 대통령실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통령께선 하루 4시간만 주무시는데, 우리는 4시간만 자면서 일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업무가 끝나면 일찍 관저로 퇴근하고, 휴가도 좀 가고, 휴일에는 쉬시라고 건의도 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웃으며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잠을 적게 자가며 열심히 일하겠다는 대통령을 타박할 수는 없다. “청와대 근무하면서 고생길이 텄다. 우리가 힘들수록 나라가 잘 되고 국민이 덜 힘들다”는 대통령의 말에 감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정권 출범에 앞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두 달 가량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휴일도 없이 일했다. 인수위 관계자들은 ‘노 홀리데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청와대 입성을 꺼린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 헛소문은 아닌 모양이다.
이 대통령은 아침 국무회의 시간도 1시간 30분이나 앞당겼고 업무보고도 현장에서 아침 7시30분에 받기로 했다. 내각과 청와대의 운영도 격식보다 실질과 효율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일하는 분위기로 일신하려는 이 대통령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개발시대 리더십으론 안 통해
그러나 대통령이 선도하고 있는 변화 몰이에 선뜻 박수 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것들이 대개 60, 70년대 개발시대에 요구됐던 리더십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나 일 중독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개발시대에 우리에게 일 중독은 미덕으로 받아들여졌다.
‘선진’국에서는 일 중독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장애로 취급된다. 적게 일하고, 좀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하고, 여가를 즐기고 문화를 향유하는 데 써야 선진국이다. 삶의 질은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은 사회구조로 변화하는 데 토대가 된다. 이 대통령이 강조하는 창조적 실용도 여유 있는 삶에서 발현될 수 있는 것이지 숨막히는 업무량에 짓눌려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일 강조가 자신과 청와대, 그리고 공직자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적게 일하는 미덕’에 대한 이해가 없는 대통령과 참모들이 많이 일해야 살 수 있는 구조를 적게 일하는 구조로 바꾸어 가는 변화를 이끌 수 없다. 일에 대한 대통령의 잘못된 인식은 진정한 선진화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25개국 중 가장 일 많이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2006년 기준으로 우리의 연간 평균 근로시간은 2,357시간에 이른다. 주 5일제 근무 등으로 많이 좋아진 것이 이 정도인데, 가장 적게 일하는 네덜란드의 1, 391시간에 비해 두 배에 가깝다. 연간 근로시간이 2,000시간이 넘는 나라는 우리 외에 그리스(2,052시간) 뿐이다. 체코와 같은 동구 국가도 2,000시간이 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고 하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일을 많이 한 결과일 뿐이다.
21세기의 가치 실현할 비전을
새 정부가 선진화를 말하면서 선진화의 척도인 삶의 질을 외면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 대통령이 선진화의 목표로 내세운 ‘7ㆍ4ㆍ7’ 공약에는 양적 지표만 있고 삶의 질은 없다. 인수위가 제시한 새 정부의 국정지표와 과제들도 우리 나라를 선진화로 이끌 구체적인 실천 방책을 결여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앞선 정권들의 정책을 단순히 뒤집는 수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대통령의 의욕은 높이 살 만하지만 개발시대의 CEO 리더십에 머문다면 별 희망이 없다. 이제 취임한 지 겨우 2주 남짓에 준비운동하는 단계에서 희망이 없다고 하면 지나치게 성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을 선진화의 반열에 올려놓을 비전과 방법이 빈약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선진화를 실현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창조적 발상이 필요한데 적어도 지금까지 새 집권세력은 그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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