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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영상미-매너리즘 사이 '실연 로드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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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영상미-매너리즘 사이 '실연 로드무비'

입력
2008.03.0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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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몽환이 사람들의 내면으로 스미던 1990년대. 비릿한 누아르의 공장으로만 알던 홍콩에서 뜻밖의 영화들이 날아왔다. <아비정전> (1990년), <중경삼림> (1994년), <타락천사> (1995년), <해피 투게더> (1997년), <화양연화> (2000년)…. 만나고 아파하고 그리워하는, 젊음의 파편 뭉치를 떠안은 청춘들은 왕자웨이(王家衛)라는 이름의 새로운 감수성에 빠져들었다.

왕 감독의 영화는, 상처로 부어오른 가슴팍을 파헤치는 야전삽 같았다. 매혹적인 영상에 묻힌 것은 사랑이 뽑혀 나간 시린 자국. 그것을 거칠게 뒤엎는 삽질은, 그러나 치유와 성장을 위한 땅다짐으로 기억된다. 90년대의 감수성이 살아 있는 왕자웨이의 새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my blueberry nights)> 가 6일 한국 관객을 찾는다. 개봉을 앞두고 왕 감독을 이메일로 만났다.

“미국을 선택한 게 아니고 미국에 살면서 영어로 말하는 여자 배우, 노라 존스를 선택한 겁니다. 애초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지 않았다면 이뤄질 수 없는 프로젝트였어요. 할리우드 영화라는 틀은, 노라 존스로 인해 일어난 ‘테크니컬’한 결과라고 할 수 있죠.”

이번 영화는 왕 감독이 처음으로 미국의 영화 시스템에 편입돼 만든 할리우드 영화다. 량차오웨이와 장만위 대신 주드 로, 나탈리 포트먼, 레이첼 와이즈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름이 크레딧에 올라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재즈 가수 노라 존스. ‘돈트 노우 와이(Don’t know why)’로 그래미상을 휩쓸었던 그녀가 이 영화로 배우 데뷔를 했다. 왕 감독은 노라와의 특별한 인연을 길게 설명했다.

“이 영화는 <화양연화> 에서 파생된 아이디어에요. 자정쯤 한 식당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죠. 처음엔 음악을 부탁하려 노라를 만났는데, 그녀의 ‘영화적인’ 목소리에 반했죠. 이 여성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굉장히 ‘내츄럴’한 사람이기 때문에 따로 연기를 공부할 필요가 없었어요. 노라가 주인공의 캐릭터 속에서 그녀와 비슷한 모습을 찾아내 주기를 바랐습니다.”

처음 부닥친 할리우드의 영화작업 환경은 어땠을까. “량차오웨이와 주드 로, 장만위와 노라 존스는 그 어떤 점에서도 비슷하지 않아요. 유일한 유사점이라면 재능이 무척 뛰어나고 모두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일까….” 왕 감독은 “배우나 스태프가 모두 조합해 소속돼 있어 이것저것 지킬 것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나 한계에 관한 질문엔 답을 하지 않았다.

왕 감독 영화의 변치 않는 미덕은 감각이 돋보이는 섬세한 영상이다. 즐겨 쓰는 방법은 고속촬영 후 프레임을 축소, 줄인 프레임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스텝 프린팅’ 기법. 툭툭 끊기면서 슬로모션 효과를 주는 이 기법은, 촬영된 인물들이 늘어난 시간 속에서 불안하게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거칠게 입자를 틔운 화면과 이미지를 감싸는 감각적인 음악도 녹슬지 않는 왕 감독의 솜씨다.

“내 영상이 많이 흔들리고 어지러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렇다고 무슨 마약 같은 걸 하지는 않아요. 그저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 다른 인생들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의깊게 관찰하면서 그때마다 드는 생각을 놓치지 않을 뿐입니다. 스텝 프린팅 기법은 내게는 일종의 ‘현실 리믹스’ 같은 것이죠. 똑 같은 일이라도, 그런 식으로 하면 느리지만 느낌이 더 강하게 옵니다. 음악도… 난 언제나 내 자신을 DJ라고 여겨요. 말하자면, 내 영화 공간은 내가 DJ를 보는 나만의 스테이션 같은 거죠.”

그러나 왕 감독의 영화는 <아비정전> 과 <중경삼림> 의 감수성에서 정체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지난해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이번 영화가 공개됐을 때도, 평단의 반응은 찬사보다 비판 쪽에 가까웠다. 매너리즘의 절정이라는 혹평도 있었다.

“<중경삼림> 을 만들 때나 지금이나, 내가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영화는 오히려 지금 더 젊어졌다는 말을 많이 듣고, 나도 그렇게 느껴요… 내 영화들은 뭔가를 발견하고 깨닫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에요. 주인공 캐릭터로 특별히 상처받은 영혼만 추구하지는 않지만, 아픔을 보여주지 않고는 어떤 회복도 표현하기 힘들겠죠… 나나 내 영화를 지나치게 분석하는 건 재미 없는 일일 겁니다.”

■ 리뷰/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끝난 사랑에 아파하는 엘리자베스(노라 존스)가 연인과 자주 찾던 카페에 들른다. 마음을 잡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카페 주인 제레미(주드 로)가 블루베리 파이를 준다. “블루베리파이는 아무도 찾지 않아요. 그래도 링榕?놓죠. 언젠가 누가 찾을지도 모르니까….”

매일밤 카페를 찾던 엘리자베스는 문득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난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여러 사랑과 이별을 목격하고, 제레미에게 발신지 없는 엽서를 부친다. 계절이 돌아 떠나던 날과 비슷해질 무렵, 엘리자베스는 제레미의 가게를 다시 찾는다. 제레미는 그녀에게 다시 블루베리 파이를 내어 준다.

사랑 이별, 성장의 에피소드가 로드무비 형식으로 엮이고, 왕자웨이 특유의 감수성이 물감처럼 스크린에 번진다. ‘압도적’이라는 평가가 합당한 왕자웨이의 영상미도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넘치는 감상과 작위적 설정, 전작의 이미지가 겹치는 클리셰는 왕자웨이 영화가 아직 종착점에 다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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