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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세대 김기탁의 한국을 세계에 팔다] <8> 7살때 부친 여윈 후 "사업가 돼 집안 세우자" 막연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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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세대 김기탁의 한국을 세계에 팔다] <8> 7살때 부친 여윈 후 "사업가 돼 집안 세우자" 막연한 꿈

입력
2008.03.0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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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내 나이 겨우 일곱 살. 죽음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지만, 내 밑으로 걸음마도 채 떼지 못한 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남편의 부재를 선명하게 느껴야 했던 어머니도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가족에게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겨줬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 없이 살아가야 할 시간이 너무 길다는 걸 알게 됐다.

여리지만 강인했던 어머니는 우리 다섯 남매를 곧은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어머니는 “교육을 제대로 받아야 집안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늘 강조하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우리 가족의 생존 문제로 이어졌다.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어머니 혼자 키우기엔 너무 벅차다는 걸 난 어린 나이에 이미 깨달았던 것 같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맏이인 내가 사업을 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이 강했다.

그래서 인문계가 아닌 상고에 진학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꿈을 키웠다. 어린 동생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돈을 많이 벌어 공부를 시키는 것밖에 없었다. 상고를 간 이유는 오직 한가지였다. 동생들에겐 내가 형이자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한 최선의 선택은 사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무역 인생이 시작됐다. 무역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어떻게 해서든 성공한 무역인이 되고 싶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무역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그 시절에 무역이 뭔지도 모르고 뛰어 들었으니 그 때의 배짱은 ‘절실함’과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사업을 할 만큼의 밑천도 없었고, 더욱이 무역업에 뛰어 들 만큼의 자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해방 후 홍콩으로 가는 무역선에 맨 몸으로 올라타면서 인생역전이 시작됐다. 무역에 대해 전혀 몰랐던 문외한에서 전문 무역인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사업을 하면서도 그때 그 용기를 떠올리며 어려움을 돌파해나갔다. ‘하면 된다’라는 불굴의 의지가 전부였던 그 시절이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한 것이다. 이제 무역을 빼놓고는 내 삶을 얘기할 수 없게 됐다. 덕분에 동생들도 잘 성장했다. 내가 걸어간 길이 내 삶도, 우리 가족의 삶도 바꿔 놓았지만, 사실 내겐 다른 꿈이 있었다.

법관이 되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법관이 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두고 그 길을 갈 순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법관의 길을 가지 않은 것에 감사한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도울 길이 그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법관이 됐다면, 권력에 욕심 내는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법관 김기탁’이라고 불리우기 보다, ‘무역1세대 김기탁’이라는 칭호가 더 좋다.

내겐 11명의 손주가 있다. 그 아이들에게 늘 해주는 말이 있다. “권력의 자리를 탐내지 말아라, 재물 역시 자기가 가진 것 외에는 욕심내지 말아라”라는 것이다. 이게 내 삶의 철칙이고 바람직한 삶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늘 해주시던 말씀 때문이었을까. 나는 사업가가 되고 나서도 단체 활동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됐다. 사업은 나와 내 가족의 윤택함을 위한 것이지만, 사업가의 소명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무역협회, 상공회의소, 국세심판원, 금융통화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등. 내가 몸담았던 단체들이다. 내 무역인생의 반은 단체 활동에 쏟아 부은 셈이다.

사업을 하는 내게 단체 활동은 또 다른 성취감을 느끼게 해줬다. 개인적인 삶이 아닌 공익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건 무역인으로서의 성공만큼이나 보람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역협회 14년, 상공회의소 14년. 가장 오래 몸담았던 단체들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삼화제지 명예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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