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인구 3,000명의 작은 도시 세큄. 주민 대부분이 밭을 갈고 소 젖을 짜는 마을에서 태어난 검은 머리 소년은 트랙터 소리에서 음악을 느꼈고, 할아버지의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에 맞춰 춤을 추곤 했다. 음악이 유일한 친구였던 이 소년은 20여년 후 1년 내내 비행기를 타고 연주 여행을 다니는 음악가가 됐다. 호두까기>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30)이다. “어렸을 때는 농부가 되고 싶었고, 좀 더 자라서는 바깥 세상으로 달리는 버스 기사를 꿈꿨어요. 음악가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제게 음악가란 할리우드 스타보다 빛나는 존재였거든요.”
오닐이 자신의 인생을 담은 에세이 <공감> (중앙북스 발행)을 출간한다. 6ㆍ25 전쟁 때 미국에 입양된 어머니의 가족을 찾는 내용의 TV 프로그램 <인간극장> 을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그는 이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파는 클래식 연주자다. 인간극장> 공감>
책 출간에 맞춰 한국에 온 오닐은 “대중에게 클래식을 쉽고 가깝게 소개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이라면서 “직접 선별한 음악들을 경험담과 연관지어 독자들에게 권했다”고 소개했다.
책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음악들이 그의 인생 이야기를 타고 흐른다. 음악가라는 직업에 대해 알려준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 어머니와 함께 들었던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 비올라의 아름다움을 깨닫게한 슈베르트의 현악5중주 C장조, 손자의 음악 레슨을 위해 10년간 매주 왕복 여섯 시간을 운전했던 할머니의 차에서 수없이 부르던 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 니벨룽의> 환상교향곡> 브란덴부르크>
그는 책을 쓰면서 잊고 있던 어린 시절 추억이 되살아나 행복하기도 했지만,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슬픔도 느꼈다고 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조부모는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어머니와 오닐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동양인도 거의 없는 시골에서 김치를 담가주셨어요. 큰 독에 배추를 썰어넣고 돌로 눌러두시곤 했는데 백김치에 가까운 맵지않은 김치였죠. 하지만 아주 맛있었습니다.” 그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섬집 아기> 를 2집 음반 <눈물> 에 싣기도 했다. 책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도 드러나있다. 눈물> 섬집>
그는 “어머니는 맑고 순수한 분이며 스스로 피아노 치는 법을 터득했을 만큼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다. 어머니께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바이올린을 하던 그가 13세에 비올라로 전향하게 된 사연도 재미있다. 음악 축제 오디션에 늦어 바이올린 주자 자리가 마감이 되는 바람에 엉겁결에 자리가 남아있던 비올라를 하게 됐다. 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비올라의 음색에서 금세 편안함을 느꼈고, 비올라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특히 처음 배운 비올라 곡인 월튼의 비올라 협주곡은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18세에 세계적 지휘자 주빈 메타 앞에서 연주해 “너는 훌륭한 연주자가 될 것”이라는 격려를 받았던 것. 오닐이 1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런던 필(지휘 블라디미르 유로프스키)과 협연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해온 작품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번 공연에 기대가 큽니다.”
오닐은 6월에는 실내악 앙상블 디토의 리더로 찾아오고, 여름에는 독일에서 네 번째 음반을 녹음한다. “아직 구체적 내용은 비밀이지만 유명한 앙상블과 함께 한다”는 게 그의 귀띔. 링컨센터 체임버 뮤직 소사이어티 활동과 세계 투어, UCLA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역시 계속된다. 매번 새로운 것을 들고 찾아오는 그에게 아직도 도전하고 싶은 일이 남았냐고 물었다. “언젠가는 지휘에 도전하고 싶어요.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사주신 지휘봉은 부러졌지만, 그 때 들었던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연주는 여전히 마음 속에 있거든요.”
김지원 기자 edd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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