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케스 음다 지음ㆍ이명혜 옮김검둥소 발행ㆍ328쪽ㆍ1만1,000원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시대를 거쳐 민주화에 이른 남아프리카공화국 현대사 속 흑인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모든 것은 우리 어머니들의 죄에서 비롯된다(되었다)”란 문장으로 시작되고 끝맺는다.
남아공 출신 소설가로 현재 미국에서 영문학 교수, 화가, 작곡가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자케스 음다(60ㆍ사진)는 작품 첫머리와 말미에도 새 천 년(2000년) 딸 ‘포피’가 자신과 어머니를 비롯한 흑인 여성 누드를 즐겨 그렸던 백인 신부의 작품을 감상하는 장면을 거듭 배치해 시작-끝이 맞물리는 순환 구조를 강화한다.
작품의 몸통은 동일한 머리와 꼬리가 이루는 (폐)곡선 내 흑인 여성 2대가 그려온 삶의 궤적이다.
인종차별 시대를 관통한 어머니 ‘니키’의 젊은 날은 수난사다. 어린 시절 그녀의 친구들은 푼돈을 받고 호색한 백인 농부가 그녀를 성적 노리개로 삼는 걸 방관한다. 금광 노동자 남편은 그녀의 정숙을 의심하며 수시로 폭력을 가한다. 그녀가 일하던 푸줏간 백인 여주인은 그녀가 고기를 훔쳤다고 의심하며 알몸으로 몸수색하는 수치를 안겨준다.
니키는 여주인의 남편과 정을 통해 딸 포피를 얻는 것으로 모욕을 되갚지만, 보어인(남아공 주류 백인) 사회는 백인-흑인 간 성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위반했다며 이를 단죄한다.
1971년 남아공 엑셀시오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프로 한 이 장면에서 음다는 흑인 여성에겐 ‘주홍글씨’를 새기고 백인 남성에겐 교묘한 사면을 선물하는 법정의 이중적 처신을 냉소적으로 묘사한다.
흑인들의 차별 철폐 요구가 거세지며 니키의 자녀는 어머니와 다른 시대를 맞는다. 남편이 친부인 아들 ‘빌리키’는 반정부 지하운동에 투신하고, 컬러드(흑백 혼혈인)라며 흑백인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고 살던 포피도 이에 적극 가담한다. 90년 아파르트헤이트가 공식 철폐되면서 남매는 지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새 역사 초입에 짐작과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운동권 흑인 세력이 분열하면서 과거 탄압자의 편에 섰던 흑인들이 민심을 얻는다. 백인 사회도 그들만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강경파부터 흑인들과 손잡고 영리를 꾀하자는 실리파까지 사분오열한다. 인권과 자유가 대폭 신장된 가열찬 진보의 역사를 작가가 (직선이 아닌) 순환의 틀에 담은 이유가 여기 있다.
이상과 멀어지는 현실에 대한 환멸로 남매는 정계를 떠난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리는 폐곡선이 남아공에서 일어난 변화를 모두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인종차별의 엄혹한 벽이 무너진 자리에 피어오르는 화해의 기운을 작품 말미에 배치한다.
포피는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이복오빠와 오랜 반목의 세월을 마감하려 한다. 빌리키는 컬러드 소녀와 사랑하며 거리의 악사로 자유롭게 떠돈다. 그 뒤엔 남매에게 사랑과 용서를 독려하는 어머니 니키가 있다. 모든 것은 어머니들의 죄에서 비롯됐지만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어머니들의 사랑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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