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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에세이] 영어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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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에세이] 영어 몰입?

입력
2008.03.03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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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들끼리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대화가 얼마나 단순한지 보여주는 재미있는 자료가 있다.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나(I)', '그리고(and)' 등등부터 시작해서 '어(uh)?!'까지 12개 단어가 전체 대화의 30%를 차지했다. 믿거나 말거나 848개의 단어가 전체 대화의 90%를 차지한다.

예를 들면 같은 책에 더욱 상세한 자료가 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언제든지 좋아하는 연속극이나 시트콤을 관찰하면 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 근로자들이 일상 언어는 빨리 배우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정보이론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우리의 일상대화는 정보를 매우 적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눈짓 손짓만 해도 대부분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반드시 말을 해야 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한 시간 방영하는 연속극을 해찰하며 3분만 띄엄띄엄 보더라도 줄거리를 알 수 있다. 중국 무협 비디오는 3배속으로 틀어놓아도 보는 데 아무런 지장 없다.

그래서 예전에 영국에서 만든 'English 900'이라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문장 900개와 단어 900개만 달달 외우면 영국 군인과 같이 전쟁터에 갈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하게 영어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다. 영국이 네팔에서 용병을 선발하는 것을 찍은 프로그램도 최근 방영된 바 있다.

미국에서는 많은 장애인들도 의사소통하며 살고 있다. 버스에 처음 타 보는 문맹자도 동전을 꺼내 들고 "Now(지금)?" 할 줄 안다. "버스요금을 탈 때에 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초조하게 영어로 작문하려 드는 것은 한국인이다.

패스트 푸드점에 가본 사람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자기가 가져와야 한다는 것을 아니까 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미국의 일상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체면 내지는 자존심을 의식해서 어려워할 뿐이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어 몰입이 아니라 문화 몰입이다.

실제 해외에 나가보면 손으로 가리킬 수도 있고 간단한 회화 책을 찾아볼 수도 있다. 조선시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당대 최고의 선비들도 종이에 한자로 썼던 필담(筆談)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보관했으며 다만 불편하다고 했을 뿐이다.

요즘 그런 일을 했다가는 부모님은 자식이 대학을 헛 다녔다며 한탄하거나 상사는 귀국 즉시 부하직원을 인사조치하려 들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직원들이 일본인이나 중국인과 종이에 즐겁게 한자를 써가며 회식 후 이차까지도 간다.

물론 사무적인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나머지 10%의 단어에 있으며, 뉴스나 교양서적을 읽으려면 어느 언어라도 보통 2만 개 이상의 단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정도 구사할 줄 아는 이중언어 능력자는 대단히 드물다.

서울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자기 돈 쓰며 노는 데 필요한 외국어는, 천자문이다 생각하고 두어 달 외우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중앙정보국(CIA) 홈페이지에 나오는 것처럼 이중언어 능력은 해당 국가에서 4년제 대학까지 교육 받은 사람과 시사뉴스와 업무에 관해서도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교포 사회에도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런 인력을 원한다면 외국어대학이나 외교관 양성기관, 그리고 대기업에서 자체 교육하는 것이 가장 빠를 것이다.

한상근·KAIST 수리과학과 교수

<저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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