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대한 서구 전통의 인식은 현실적 힘을 불가결한 요소로 삼았다. 물리적 강제력을 통해 타인을 그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으로까지 이끌어갈 수 있는 힘, 즉 타인을 복종시키고 지배할 수 있는 힘으로 이해했다. 이런 권력 개념은 17세기 역학 발전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모든 물체가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에 따라 역학적 에너지를 가지듯, 어떤 권력 수단을 가진 사람은 타인을 지배하는 특별한 힘을 갖게 마련이라고 보았다.
이런 인식대로라면 권력은 타인에게 구체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이자 힘이다. 권력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타인을 몰아갈 수 있는 능동적 힘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권력의 현실적 측면보다 추상적ㆍ규범적 측면이 강조됐다. 애초에 '권력'은 저울막대인 '권(權)'이 가진 힘이었다.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 만물의 가치를 재는 기준이었다.
물건의 무게를 달아 가치를 결정하고, 사람의 능력을 재어 쓰임새를 판단하는 힘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무게와 가치를 확인할 뿐,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들거나 타인에게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이 아니다.
더욱이 저울막대로 물건의 무게를 달 때는 저울추인 '형(衡)'이 반드시 필요하다. 저울추가 제자리에 놓여 저울막대가 수평을 이룰 때만 물건의 무게를 달 수 있듯, 권력은 '제약'을 거쳐서야 나타나는 힘이다.
■ 역사발전과 함께 몫은 줄어
민주주의 발전으로 서구의 권력 개념도 '제약'을 불가결한 요소로 흡수했다. 적극적으로 의사를 실현하는 권력 본연의 힘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나 가능해졌다.
동시에 타인에게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이었던 권력이 타인의 행동을 일정 범위에 제약할 수 있는 힘으로 후퇴했다. 그 결과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권력은 '제약'과 한계 내의 '실현'이라는 두 가지 힘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제약하는 한편으로 그 행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합의는 주로 재화와 사회적 가치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권력은 사회적 합의라는 큰 틀의 '제약' 안에서 재화와 사회적 가치의 분배 방식을 결정하고 실현할 수 있는 힘에 그친다. 과거 권력의 내용을 이루었던 다른 많은 힘은 '사회적 영향력'이라는 형태로 정치권력 밖으로 빠져 나갔다.
현대사회에서 권력의 후퇴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특히 경제적 '압축 성장'에 비길 만한 '압축 민주화'를 거친 한국사회의 권력 후퇴는 급격할 수밖에 없다. 1987년 민주화 이후 20년 사이에 정치권력이 정책 결정을 주도하는 힘이 급속히 약화했고, 본격적 지방자치로 중앙권력의 많은 부분이 지방으로 넘어갔다.
권력 행사의 구체적 대상인 재화와 사회적 가치의 분배에서 민간기업의 몫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더욱이 'IMF 위기' 이후 뚜렷해진 규제완화 흐름은 기업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정치권력마저 약화시켰다.
이런 상식에 비추면 현재의 정치권력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4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주요 대선 후보 주변에 쟁쟁한 인사들이 몰려든 것도 그랬지만, 4ㆍ9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과 통합민주당의 공천 신청 인파는 상식을 배반한다.
■ 변함 없는 '제한' 필요성
상대적으로 정치권력이 많이 약화하고 사회 다른 분야의 힘이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사회의 전체적 성장에 따라 정치권력이 분배를 결정할 수 있는 재화와 사회적 가치의 절대적 크기는 조금도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재산과 충분한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도 장관 자리에까지 욕심을 내다 망신만 자초한 사람들, 굳이 국회의원이 되어 얻을 수 있는 이익이나 가치가 무엇인지 의심스러운데도 공천 신청에 뛰어든 사람들.
대부분 '사회적으로' 성공한 경험이 토대가 됐을 이들의 권력 욕구는 확고하다. 그 모습에서 앞으로도 권력은 '제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절감한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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