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드디어 배역이" 뛸듯한 기쁨도 잠시… 대사는 단 한마디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영화감독 하명중의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드디어 배역이" 뛸듯한 기쁨도 잠시… 대사는 단 한마디

입력
2008.03.03 00:42
0 0

어? 저기, 새싹 봐라....

드디어 나에게 배역이 주어졌다. 탤런트로 공채된 지 꼭 1년 5개월만이었다.

권창안이 목숨을 던지고 나에게 주고 간 그 무대는 나의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선보일 절호의 기회였다. 그 날 꽉 찬 국립극장 객석 여기저기에는 방송작가, PD들이 끼어 있었다. 나는 혼신을 다 해 뒹굴고 소리치고 노래하며 나 여기 있다고 외쳤다.

막이 내리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나는 정신없이 무대 중앙으로 뛰어나왔다. 그리고 보았다. 이 기적 같은 사건을.

얼마가 지났다. 이평재 PD가 대사 있는 역할을 처음 나에게 주었다. 실화극장의 최고 인기작가 김동현씨가 처음으로 쓰는 멜로드라마 일요극장이었다. 일요일 밤 최고 시청률 시간대에 방송되는데다 당대 연극, 영화, TV계의 최고 지성파 배우인 김동원 선생(아버지 역)과 영화계 톱스타 이민자 선생(어머니 역)이 주역으로 결정되었다. 방송이 나가기 전부터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두 하늘같은 스타 틈새에 나는 반항기 있는 외아들 역이다.

대본을 받자 곧장 남산 공원 벤치로 달려갔다. 그날, 남산 숲의 공기는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아니 근 2년여 남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남산 숲을 찾은 것은 사실, 그 날이 처음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대본을 넘겼다. 읽고 또 읽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내 대사는 한 마디 밖에 없었다.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았다.

‘딸랑 대사 한 마디.’ ‘한 회 나오고 끝나는 역’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은 꽉 찬 나뭇가지에 막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검은 가지들 사이로 찬란하고 뜨겁게 역광이 쏟아져 내려왔다. 실루엣의 나뭇가지들은 그 빛에 녹아 사라져 갔다. ‘그렇다. 이 기회를 저 역광처럼 만들어보겠다. 저 틈 사이 빛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이 역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 선배들을 찾아 나섰다. 우리의 아지트인 명동 ‘음악다방’으로 달려갔다. 극작가 전진호, 시나리오작가 백결, 영화조감독 전운식, 양택조 선배들을 찾았다. 답은 바로 나왔다.

“흠....부잣집 외아들이 아버지 차를 몰고 나가 교통사고로 죽는다. 간단하네. 한 컷이네. 거기서 니 껄 다 보여줘야겠지. 흠... 있지! 페드라! 거기서 안소니 퍼킨스를 연구해 봐.“

쥴스 다신 감독의 는 당시 세계를 휩쓰는 빅히트작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미우만, 종로, 아테네, 극동, 미아리 등 재개봉 동시상영극장을 뒤져 안소니 퍼킨스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또 보며 그의 스타일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였다. 방송국 소품 담당 형과 의상 담당 아줌마를 끌고 극장에 가서 같이 보고 의상창고와 소품창고를 쥐 잡듯 뒤져 비슷한 의상, 소품을 준비했다. 물론 정상적으로 분장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분장 조수 형은 어느 기본 색이 내 얼굴에 맞을지 바르고 또 발랐다.

마침내 연습 날이 왔다. AD가 연기자들과 작가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김동원, 이민자 선생님이 매우 기뻐하였다.

‘드디어 뽑혔군.’

‘명종 씨가 내 아들이야. 와, 정말 잘 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가 좋아하니 더 기분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대본 읽기가 시작됐다. 한참 후 내 차례가 왔다. 얼마나 연습했는가. 나는 자신 있게 대사를 뱉었다.

‘엄마, 나 시간 없어. 빨리 자동차 키 달란 말이야!’

그런데 대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PD가 대본을 덮어 버렸다.

‘야야야야야, 넌 엄마 그렇게 부르냐? 다시 해봐.’

다시 해도 마찬가지였다. PD가 뜨악해졌다.

‘너, 엄마 불러본 적 없어?’

내 얼굴이 시뻘개졌다. ‘엄마 빼고, 나머지만 해.’

나는 한번도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으니 아무리 연습을 한들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어차피 나에겐 ‘엄마’가 없었으니까. ‘엄마’를 빼고 나머지 대사만으로 간다.

목숨을 건 방송 날이다. 나는 새벽같이 방송국으로 달려가 분장과 소품을 챙기고 스튜디오에서 정신없이 몸을 풀고 있을 때다. 수위아저씨가 나를 부르는 것이다. 밖으로 나가보니 막내누나가 보따리를 들고 싱글벙글하며 서있다.

‘웬일이야?’

누나가 보자기 속에서 꺼내 보인 건 새까만 연미복(턱시도)이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내가 부잣집 아들 배역을 받았는데 좋은 옷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니까 큰 형수가 다락에 올라가 이 옷을 나에게 줘보라고 하여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내 돌때 이 옷을 내가 장가갈 때 입히려고 만들어 놨는데 맞을런지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얼떨결에 급히 옷을 입어보았다. 정말 이건 화타지였다.

어떻게 이렇게 실물을 두고 재단한 듯 꼭 맞을 수가 있는가. 엄마는 나를 낳고 내가 어른이 되면 이만큼 자라겠구나.... 그 치수까지 알고 계셨다.

엄마는 이 세상에 없었지만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기 좋게 내놓기 위해 이미 그때, 이 옷을 마름질하셨던 것이었다.

<나의 영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내 영혼 깊은 곳에 늘 함께 하는 어머니께 보내는 러브레터이다.>

그 옷은 정말 멋졌다. 마디마디 엄마의 손바느질이 닿은 그 검정색 연미복은 이제까지 꼬질꼬질했던 나의 모습을 한 순간에 날려버렸다. 스튜디오에 내가 등장하자 모든 스탭, 연기자들의 눈과 입은 얼어붙은 듯 정지되었다. 그리고 그 날 밤 그 방송은 전국을 진동시켰고 나의 운명을 한 순간에 바꿔 놓았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