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 머서 지음ㆍ조동섭 옮김
시공사 발행ㆍ318쪽ㆍ1만2,000원
“파리의 공기는 온갖 사람들의 꿈들로 무거워져 있었다. 꿈들이 거리를 메우고 카페의 좋은 테이블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시인과 작가, 모델과 디자이너, 화가와 조각가, 배우와 감독, 연인과 도피주의자, 다들 ‘빛의 도시’ 파리에 모여들었다.“(116쪽)
삶의 어두운 구석을 들쑤시는 일을 업으로 하고, 삶도 흐트러져 가던 캐나다 한 신문의 사회부 기자. 흥미 있는 기사를 쓰려는 마음에 고액 연봉자였던 그는 범죄자들의 세계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었고, 마침내 제보자의 이름을 글 속에 넣고 말았다. “무릎을 부숴 주겠다”는 협박에 그는 황망히 신변을 정리한 뒤, 새 해가 되기 사흘 전의 1999년에 파리로 떴다. 못다 한 불어 공부나 마치자는 심산이었다.
이 책은 졸지에 숙식을 구걸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한 남자가 파리의 유명한 영어 서적 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독특한 회고록이다. 거기서 그는 옛 문인들의 글을 만났고, 하루 종일 책만 들여다 보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보았고, 간절히 바라던 잠자리는 물론 홍차 파티까지 덤으로 얻었다. 센강 끝에 있던 고서점에서 이방인은 “캐나다 작가”로 불리며 희망이라는 약을 발견한 것이다.
없는 자들끼리의 독특한 유대감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B급 영화를 찍다 강도를 만나 거덜난 사람, 책 더미 속에서 소설가의 꿈을 키워가는 사람…. 이들은 치즈와 바게트를 거의 공짜로 무한정 먹을 수 있는 법, 하룻밤 설교를 듣고 큰 피자를 거저 얻어 먹을 수 있는 교회 등에 관한 정보를 주고 받으며 나름의 안빈낙도를 실천했다.
운 좋으면 코데인(진통제)이나 마리화나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루에 한 권 독파’를 규칙으로 지켰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어지러운 자신감과, 오랫동안 그런 지식을 얻을 수 없었다는 음울한 자괴감 사이에서”(211쪽) 갈등했다.
유럽 지식인들이 일궈내는 풍경을 엿볼 수도 있다. “루마니아 차우셰스쿠의 인권 침해나 쿠바의 난민 등 공산주의에 부정적인 이야기만 들리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매스미디어 종사자들이 (공산주의 사회의)성공담을 퍼뜨리려 하지 않기 때문(268쪽)”이라는 등 유럽 지식인들의 반골 기질이 좋은 예다.
이듬해 8월초, 50프랑을 얻은 지은이는 런던으로 가서 그 간의 생활과 결별한다. 출판사를 차린 그는 4년 뒤,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인수해 리모델링했다. 함께 지내던 사람들도 각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짬 나는 대로 서점에 들러 일을 거들어 준다. 그들 모두 책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낡은 책의 향기 속에서 삶의 힘든 마디를 함께 넘겨 낸 동지이기 때문이다.
장병욱 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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