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을 보고 종합적 판단을 한 뒤 사지(死地)로 뛰어들어야 하는데, 시민들은 ‘빨리 빨리’만 요구합니다. 우리가 안고 가야 하는 운명이겠죠.”
숭례문 화재 초기 진화 실패 이후 일선 소방관들의 화재 조기 진압 강박증이 심해지고 있다. 26일 새벽에도 한 소방관이 불을 빨리 끄려고 화재 현장에 홀로 뛰어들어 화마(火魔)에 맞서다 순직했다.
‘나 홀로 소방대장’의 죽음
이날 오전 2시50분께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문봉동 한 골프연습장에서 불이 나자 일산소방서 장항안전센터 조동환(46) 소방장은 혼자 장비를 챙겨 현장으로 달려갔다. 장항안전센터는 인력 부족으로 2명이 24시간 교대하는‘나홀로 소방대’다.
조 소방장은 골프연습장 A동 3층 출입구가 막혀 있자 B동 2층으로 향했다. 무거운 소방호스를 메고 두 건물을 연결하는 길이 2m, 폭 90㎝의 나무다리에 발을 내딛는 순간, 조 소방장은 다리 위에 쌓인 채 얼어붙은 눈에 미끄러져 11m 아래로 추락했다.
당시 현장에는 중산안전센터 등 다른 곳에서 온 소방관들도 있었지만 화재 진화와 소방차량의 소음 등으로 조 소방장의 추락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 소방장은 불길이 모두 잡히고 현장이 정리된 오전 3시52분께야 발견돼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일산 동국대병원에 마련된 빈소에서 유족들은 “어떻게 화재 현장에서 홀로 죽을 수 있는지 속시원히 알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동료들도 “함께 출동했거나 추락 사실을 조금만 일찍 알아 응급처치만 했더라면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상관인 이경인 소방경은 “지역대는 24시간 맞교대가 대부분이고, 쉬는 날에도 점검 등 때문에 소방공무원들은 항상 피곤에 절어 있다”고 현실을 전했다.
소방관들 ‘숭례문 증후군?’
열악한 상황에 더해 이날 조 소방장이 단독으로 소방호스를 끌고 건물에 진입했던 것처럼 숭례문 화재 이후 소방관들의 화재 조기 진압 스트레스가 심상치 않다.
서울 은평소방서의 한 소방관은 숭례문 화재 이틀 뒤인 12일 불광동 2층 건물 화재 상황을 전하며 “숭례문 화재 이후 인명 구조나 화재 진압에 투입될 때면 긴장감이 더 높아진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불이 나면 상황 파악이 먼저인데 피해자 분이나 시민들은 ‘빨리 안하고 뭐하냐. 놀고 있냐’고 재촉한다”며 “12일 화재 때도 건물에 남은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도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나 재확인 한 뒤에야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말했다. 숭례문 화재로 여론의 질타를 받는 와중에 인명 피해라도 났으면 어떻게 됐겠냐는 것이다.
서울의 다른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소방관도 “화재를 빨리 진압하는 것은 기본이자 습관”이라며 “그러나 숭례문 화재로 비난도 받고 하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커지고 화재 진압이 부담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마포소방서 구조진압과의 한 소방관은 “목숨을 걸고 화재 진압을 하지만 비난 여론을 들으면 소외감이 든다”며 “잘못에 대해 질책을 하더라도 소방관들의 애환에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원대 소방방재학과 백동현 교수는 “소방관들은 근무여건이 열악하고 소방장비 등도 노후돼 맨몸으로 화재와 싸우는 수준”이라며 “봉사와 희생 정신이 강해야 할 수 있는 소방관들에 대한 사회적 예우나 존경심이 턱없이 부족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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