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하는 불서(佛書)의 필법을 흉내내 적어야 겠다. 이 영화가 무시무시한 걸작이어서가 아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 보느냐에 따라 다른 영화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품 속엔 거친 남자의 내면, 가족에 대한 작가의 시선, 서부 유전개발의 서사, 구약성서의 한 토막을 빌린 듯한 은유 등등 무척 많은 얘깃거리가 촘촘히 박혀 있다.
따라서 주관을 전제하고 쓰는 것이 오히려 객관을 담보할 장치가 될 듯하다. 하긴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도 업톤 싱클레어의 대하소설 <오일> 에서, 자기 ‘이야기’에 필요한 구조만 따 이 영화를 만들었다. 시대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되 역사 자체엔 눈길이 가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그리되 관념적이지 않은 이유다. 이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3월 6일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오일>
나는 차가운 사막 모래를 만졌다 영화 시작하고 15분 동안 대사가 없다. 개미굴 같은 구덩이에서 홀로 은광석을 캐는 남자의 푸석한 신음 소리만 계속된다. 그 15분에 2시간 38분 간 지속될 영화의 질감을 알 수 있다. 메마르고 거친, 저승의 토양인 듯 차가운 모래의 느낌이다. 그 차가운 사막에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쇳덩이를 박고, 석유를 뽑는다.
20세기 초 서부 캘리포니아의 유정 개발붐이 영화의 배경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얼굴은 개척자의 표정도, 전형적인 탐욕스러움도 아니다. 무생물의 표면인 듯 기계적이고 잔혹하다가, 언뜻 광야의 선지자 같은 장엄함도 스친다. 악몽 속의 풍경인 듯한 사막의 질감이 캐릭터에도 그대로 번져 있다. 호러 장르 컬트영화에나 쓰일 법한 배경음악의 치찰음이, 이 영화의 촉감을 증폭시킨다.
나는 인간과 신의 사투를 들었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갈등은 유전지대를 차지하려는 다니엘과 그곳을 신의 땅으로 남겨 두려는 일라이 선데이(폴 다노)가 빚어낸다. 그러나, 다니엘이 악의 화신이 아니듯이, 일라이도 신의 대리자가 아니다. 복음주의의 한 종파인 듯한 ‘제3 계시교’의 전도사 일라이도 결국은 다니엘처럼 주체할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일 뿐이다.
폭력적인 세례의식을 행하는 일라이나, 일라이의 피를 손에 묻히는 다니엘이나 결국 신의 섭리로부터 탈주하려는 인간이다. 신은 그 인간들로부터 떨어져 있음으로써, 혹은 침묵함으로써 이들과 대결한다. 욕망에 의해 세속주의 신념과 기독교 신앙을 각각 부정하고 마는 두 사람의 외침은, 그래서 신에 대한 도전의 목소리로 들린다.
나는 고독한 인간을 보았다 다니엘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여러 유전을 거느린 석유재벌이 되고,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 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존재를 채워주지 못한다.
다니엘은 하릴없이 술과 폭력과 초점 없는 광기로 스스로를 학대한다. 집착하던 것을 이뤘을 때 근원적 고독에 부닥친다는 결론은 사실 상투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상투성에 매몰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틀’에 갇히지 않는 다니엘의 캐릭터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가족주의 환상에 빠진 미국인들을 이용하는 도구로 주워온 아이를 이용하거나, 돈을 보고 찾아온 가짜 동생을 죽이는 것도, 그래서 악인을 그리는 도구 이상으로 읽힌다.
이 고독한 사내가 마지막에 아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어쩌면 자기 연민의 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일라이를 응징하는 마지막 신. “난 끝났어”라는 다니엘의 마지막 대사는, 복수의 완성이 아니라 고독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유상호 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