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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세대 김기탁의 한국을 세계에 팔다] <7> 무역 인생서 맺은 끈끈한 인연들 '보석 같은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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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1세대 김기탁의 한국을 세계에 팔다] <7> 무역 인생서 맺은 끈끈한 인연들 '보석 같은 자산'

입력
2008.02.26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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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도 ‘무역 1세대’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다.

광복 직후 함께 홍콩무역을 주도했던 건설실업의 김익균, 한성무역의 박흥식, 화신의 주요한, 오장수 등이 없었다면 내 무역 인생의 출발도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 무역을 하는 한국인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우리 친분이 남다른 것도 당연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거주했던 서울 종로구 가회동 인근 계동에 살던 김익균과 그의 형 김광균 시인과 자주 어울리곤 했다.

김익균은 통이 큰 친구였다.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나 무역인으로 손색이 없었다. 무역협회 초대 부회장직도 열정적으로 해냈다. 그가 없었다면 무역협회도 쉽게 설립되지 못했을 거다.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무역협회 창설에 큰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조선무역공사를 통해 북한과 무역을 추진하다 납북되는 불행을 겪었다. 그게 김익균과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동지를 잃은 나는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듯 했다.

무역과는 거리가 멀었던 김광균 시인은 허무하게 동생을 보내고 아픈 세월을 견뎌야 했다. 김익균을 대신해 건설실업을 운영하고 협회에 몸담기도 했다.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호주대사 이동환과 김광균, 국회 부의장이었던 고흥문과 나는 강원도 일주를 하기도 했다. 월정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김광균에게 시를 한 수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가을 단풍을 보며 시 한수를 뽑아냈다. “월정사 굽이굽이 단풍은 불태우고/수녀원 종소리 영을 넘어 사라지네/아득타 한양길 칠백오십리/달 따라 여울 따라 밤새워 가자.”

엽연초 수출로 무역의 호황을 누렸던 시기를 떠올려 보면, 대농그룹 박용학 회장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인간성도 좋고 술도 잘 먹었던 박 회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 물자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라”는 지시를 받고 엽연초를 떠올렸다. 한마디로 엽연초 시장 개척의 선두 주자였다. 박 회장은 독일 회사와 첫 거래를 하게 해줬고, 미국 등으로 시장을 넓히도록 도와준 일등 공신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나도 엽연초 사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엽연초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이 성공은 내게 하나의 교훈을 안겨줬다. 무역인이 버려서는 안 될 가치는 바로 근면과 성실이라는 점이다. 나는 에이시 몽크 회장을 통해 이를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미국 하와이에서 엽연초 사업을 합작한 에이시 몽크 회장을 만났을 때였다. 그는 내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직접 자가용을 보내주는 등 귀빈 대접을 해줬다. 함께 샌드위치를 먹으며 사업에 대해 논의했고 합작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집으로 저녁식사 초대를 했다. 그런데 몽크 회장이 입고 있던 양복이 3년이나 된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입을 만한데 굳이 비싸고 좋은 양복을 살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몽크 회장의 성공은 바로 몸에 밴 검소함이었다.

내겐 무역 현장에서 맺은 끈끈한 인연 외에, 17년간 무역협회 활동을 하면서 얻은 소중한 관계들도 많다. 무역협회 생활 동안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바로 협회장을 지냈던 이활씨다. 그는 한마디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경북 영천 출신의 일본 와세다대 유학파로, 협회에서도 늘 균형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다. 무역에 발을 들일 당시는 물론, 여러 가지 수출품으로 큰 돈을 벌거나 단체 활동에 열정을 쏟을 때도 소중한 지인들이 내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고, 최근 내 곁을 훌쩍 떠난 이들도 있다. 먼저 떠나간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들이 바깥에서 내 에너지의 원동력이 돼 줬다면, 안에서의 원동력은 당연히 가족이다.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우리 다섯 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우셨다. 장남이었던 내가 동생들의 아버지이자 형이자 오빠 노릇을 해야 했다. 내 무역 인생은 어쩌면 우리 가족이 힘들게 살지 않도록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자 운명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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