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한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세상의 평가는 달라진다. 불미스러운 일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평범한 보통사람이 했을 때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성직자가 그랬다면 큰 사회적 스캔들이 될 수 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같은 급의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투기를 하다가 적발된 경우를 생각해 보자. 평소 재테크에만 몰두하던 사람의 부동산 투기는 큰 흉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재수가 없다고 주변의 동정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 늘 이타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사회 타락상을 개탄하던 사람의 부동산 투기는 큰 사건이 된다. 세상의 비난이 집중될 것이다.
■ ‘노무현의 위선’에 실망한 국민
두 사람이 똑같은 일을 했는데도 세상의 평가는 왜 그렇게 다른가? 이른바 ‘도덕적 우월감’ 비용 때문이다. 파란만장한 역사 때문인지 한국은 ‘도덕적 우월감’의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는 나라다. 지식인들의 논쟁이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안목을 겨루기보다는 곧잘 누구의 ‘도덕적 우월감’이 더 강한가 하는 경쟁으로 빠지곤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사회는 ‘도덕적 우월감’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치를 걸 요구한다. 이런 비용 청구에 대해 “왜 나에 대해서만 그러느냐?”고 항변하면 욕만 더 먹을 뿐이다. 이런 이치는 이른바 ‘노무현 혐오증’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긴요하다.
‘노무현 혐오증’이라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로 노무현과 그 일행이 호된 비판을 받았던 최근 상황에서 ‘노무현을 위한 변명’이 제법 나온 건 균형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보아 그런 ‘변명’은 ‘도덕적 우월감’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보수신문들의 비판적 보도를 포함한 수구 기득권 세력의 공격에 주된 책임을 돌리고 있다. 아쉽다. 그런 식으론 ‘노무현 혐오증’의 이유가 온전히 규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그건 바로 ‘도덕적 우월감’이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규정할 만큼 ‘도덕적 우월감’을 자신의 최대 무기로 삼았다. 그런데 과연 노무현은 그 우월감을 정적(政敵)을 공격하는 이외의 용도로 실천했던가?
이른바 ‘고통 분담’은 경제 실적이나 정책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차피 노무현은 그런 것보다는 서민의 아픔을 생각하는 눈물로 유권자들을 감동시키지 않았던가. 그런데 집권 후 노무현은 정적들과의 싸움에만 몰입한 나머지 서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다변(多辯)을 쏟아냈다. 그 와중에서 경제가 좋다고 큰소리친 게 수십 번이었으니, 스스로 민심 등 돌리게 하느라 애쓴 꼴이었다.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치면 대통령부터 솔선수범하면서 자신이 낙하산 태워 내려보낸 공기업 임원들의 억대 연봉에서 일부를 사회에 기부케 하는 이벤트라도 자주 벌여 서민을 위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노무현과 그 일행은 그저 부정한 돈 안 먹고 자기 봉급을 고스란히 저축하면 청렴한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집권 전 ‘도덕적 우월감’ 과시로 유권자들의 기대 수준을 한껏 올려놓고 그런 안이한 생각을 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 이젠 ‘도덕경시 세력’에 기대?
‘도덕적 우월감’ 비용을 계산하지 않는다면, 노무현 지지자들이 ‘노무현은 억울하다’고 외치는 것에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이하랴. ‘도덕적 우월감’의 비용을 요구하면서 위선에 필요 이상으로 분노하는 게 한국인들의 정서이자 문화인 것을. 노무현과 그 일행의 위선에 질린 유권자들은 그 반발로 ‘도덕이 밥 먹여 주냐’고 외치는 세력에 기대를 걸게 되었으니, 이래저래 도덕의 운명이 딱하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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